당연한 말이지만 조정의 정책은 황제가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과 황제의 관계는 언급했다. 이연은 황제와 사촌지간이었다. 그들의 어머니들은 친 자매였고 그들의 외할아버지는 동일인물이었다. 바로 북주(北周)의 독고신(独孤信)이다. 이연의 어머니는 독고신의 4번째 딸이었다. 그리고 수양제의 어머니는 독고신의 7번째 딸이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연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작위를 승계하였는데, 이것은 최소한 그 전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어머니는 그것보다 더 일찍 작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연이 고아가 된 이후로, 그의 이모인 독고황후는 그를 많이 아낀다. 수문제(隋文帝) 양견 (杨坚)도 이연에게 우호적이었다. 황제와 황후 모두가 이연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입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수양제는 이연보다 2살이 어리다. 이연이 7살때 수양제는 5살이었다. 만약 황후이모가 자주 이연을 입궁시켰다면, 이연은 수양제와 어린시절부터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현 황제와의 밀접한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게는 튼튼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을 살펴보면 이연은 자신과 황제의 관계를 그리 낙관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연은 사촌인 황제를 경계했다.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이연도 좋고 수양제도 좋다. 모두가 관농집단(关陇集团)의 후손들이었다. 이 집단의 특징은 모두가 알다 싶이 강력한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한마디로 무인집단이다. 그리고 무인들은 보통 준마를 사랑한다. 병적으로 사랑한다. 이연과 수양제도 당연히 준마를 사랑했다. 한번은 이연이 한필의 준마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준마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이연의 부인 두(窦)씨는 이연에게 조언을 한다. "황제도 준마를 사랑하는데, 당신이 이 말을 황제에게 진상하지 않으면 황제는 당신의 관직을 깍아버릴 것입니다." 이연은 이 준마를 너무나 사랑해서, 부인의 조언을 계속 무시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묘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연의 관직이 오래동안 올라가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에는 부인은 이미 작고한 이후였다. 그런에 이연은 아마도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것처럼, 준마를 수양제에게 바치는 것은 물론 황제를 위한 준마와 사냥개와 매등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곧장 효과를 봐서 그는 곧장 3품고급관에 올라가게 된다. 수당(隋唐)시대에는 3품이상이어야지 고급관원이었고 그 이하는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이연은 이때 완전히 깨닭게 된다. 자신이 말을 바치지 않았으면 황제는 절대 그를 3품관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번째 사건은 이연의 이미지때문이었다. 당시 점술가도 이연의 부귀를 점치엇다. <신당서 新唐书>에는 "3개의 유두가 있었다 体有三乳"라고 기록되어있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보면 이상하지만 당시에는 신성한 상징으로 기록되어있다. 다만<수강가화 隋唐嘉话>에서는 이런 기록도 있다.  수양제는 자주 이연과 농담을 했다 "매번 조정회의에서 물어났때마다 양제는 그를 가지고 놀렸다 每朝谒退,炀帝皆有词谑" 정리하자면 이렇다. 황제는 자주 이연를 놀려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촌형인 이연은 감히 말대꾸를 할 수 없었다. "연회에서 양제는 사람들 앞에서 이연을 놀렸다. 이연은 이연의 얼굴 주름이 자글자글하여 할머니 같다고 했다. 이연은 분노하고 원망하여 즐겁지 않았다 后因赐宴,炀帝于众因戏神尧。神尧高颜面皱,帝目为阿婆面,神尧恚(hui)不乐"이 둘은 매우 친했을까? 친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불평등하였다. 이연의 입장에서 그의 사촌동생에게 자신은 장난감이었을 뿐이었다.

세번째 사건은 한번의 조정회의에서 벌어진다. 당시 이연은 병으로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수양제는 이연의 동향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연의 생질(누이의 아들)이 있었다. "외삼촌은 병이 났습니다." 그는 황제가 이연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수양제가 관심을 가지는 방식은 매우 기묘했다. "병? 죽을것 같은가?" 이러한 어투는 분명히 이연의 죽음을 바라는 것 같았다. 이연은 훗날 이 이야기를 듣게 되고 더욱 더 황제를 경계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탐관오리처럼 연기하며 황제를 안심시키게 된다.

이러한 사건들에서 우리는 쉽게 이연과 수양제는 비록 사촌지간이고 불알친구이지만 이연은 언제나 두려워했고, 자신이 황제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언제나 전전긍긍하였다. "

그렇다면 투르크에게 패배한 일에 대해서 황제의 처리를 기다리는 현재의 상태에서 그는 자신과 황제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황제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걱정하게 된다. 더군다나 자신이 태원에서 죽는 것은 비국중에 비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고? 왜냐하면 자신의 봉국의 원류인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천하영웅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비관적인 생각들이 이어졌다. 이연은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반란이나 일으켜보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야 한가닥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하늘이 도와준다면 더 천하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이연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돌발 사건

그리고 한번의 우연한 사건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된다.

역사가 드라마같이 느껴질 때가 바로 이럴 때이다.

한번의 오해가 역사의 물길을 돌연 잡아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북방은 투르크(突厥)이 침입해 왔다. 이연은 북부의 마이군(马邑郡)으로 병사를 파견하고, 당지의 태수 왕공인(王恭仁)과 힘을 합쳐서 투르크를 막아내려 한다. 이때 이연의 군대는 왕군아(王君雅)가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수군은 패배를 하고 투르크는 승리의 나팔을 울리며 돌아가게 된다.

과연 이 전투로 얼마의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투르크가 대체 얼마나 위대한 전과를 이루었는지에 대한 기록 역시 없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주의한 것은 그러한 고증이 아니었다. 수군의 패배 처리는 역사의 새로운 도미노 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전투의 책임은 누군가가 반드시 짊어져야 했다. 이것이 대대로 내려오던 통치의 정석이다. 수양제의 조정은 더 큰 실패나 군인들의 책임감을 묻기를 위해서 당연히 일정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법에조차 상벌을 철저히 할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럼 이연에게 어떤 처분을 내렸는가?

우리가 이 일을 탐구할 때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에 남겨져 있는 기록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신당서 新唐书>의 <고조본기 高祖本纪>에 의하면 "양제가 관리을 파견하여 고조를 강도로 압송하게 했다. 고조는 두려워했다." (炀帝遣使者执高祖诣江都,高祖大惧。)

<자치통감 资治通鉴> 에 따르면 수양제는 이연과 왕공인이 적을 막지 못함을 들어 관리를 파견하여 강도로 압송하게 했다. 이연은 두려움에 떨었다."(帝以渊与王恭仁不能御寇,遣使者执诣江都,渊大惧。)

<대당창업기거주 大唐创业起居注> 에서는 수양제가 관리를 파견하엿고 "이연을 묶고 왕공인을 참수하였다"라고 적고 있다.(隋炀帝派使者前来,“系帝而斩仁恭。”)

비록 기록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위의 사실에서 전쟁실패의 책임자로서 이연이 조정의 어떠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최후의 처벌은 대체 무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지가 않다. 일단 강도로 가서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라는 것 뿐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연은 강도로 압속되어 황제의 다음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의 핵심은 이연이 황제가 행할 처벌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했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은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였냐는 것이다.

이연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판단했을까?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당(唐)조의 황제는 기존의 황제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특수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하늘칸(天可汗)이라고 하늘 지배자로 불리었다. 당조의 황자는 여러가지 옥쇄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 전문적으로 국외에 보내는 편지에 이용했던 도장에는 "하늘칸의 도장 天可汗之印" 이라고 쓰여 있다.

당조의 꿈은 바로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渊)에게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하늘칸을 얻지 못하였다.

수(隋)나라말기 고구려 공략으로 인하여 민심히 흉흉해지고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원은 그러한 수나라의 고위관리였을 뿐만이 아니라, 황제와 긴밀한 혈연관계을 맺고 있었다. 당시 아무도 당이 수나라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이원이 반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이연의 어머지는 수양제(隋炀帝)의 어머니와 친자매였다. 이연이 어려서 부모님을 잃자, 수양제의 어머니인 독고황후(独孤皇后)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이연은 아버지의 작위인 당국공(唐国公)을 어린나이게 이어받게 되었고, 그의 출세도 수문제(隋文帝)와 황후의 후광 속에서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또한 수양제와 이연은 아마도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자주 같이 뛰어놀면서 친분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반란을 잃으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악을 했을 것이다.

대체 이연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일까? 이연은 제왕 운명을 타고 나서? 이씨가 양씨를 대체한다는 유언비어때문에? 주위의 심복들이 부추겨서?


614년 태원으로 돌아가보자.

수나라는 몇 백년동안 분리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더욱 강대하기를 바랬던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략하였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거대 제국의 꿈은 날로 산산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617년의 중국은 수나라 붕괴의 전야였다. 전 국토의 산천이 불타고 민중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역사의 갈림길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누가 역사의 선택을 받을 것인가?


1. 꿈과 현실 - 이원

617년, 이연은 태원으로 파견을 나가서 잠시 머물렀었다. 당시의 관직은 태원지방의 제독(最高军政长官)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지방실력자로 성장한다. 그런데 이연이 속으로 가장 기뻐했던 것은 실제 권력이 아닌 어둠 속에서 생겨난 하나의 미묘한 생각이었다. 태원은 고대 전설 속 당요(唐尧)가 관장했던 지역이었다. 요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천하를 다시르게 되었다. 천상천아 유아독존. 이연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작위도 당국공(唐国公)이었다. 당국공이 당요의 옛땅으로 온 것이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아주아주 오래전, 어떤 사람이 이연의 관상을 본적이 있다. 그는 이연의 골상이 부귀하니 스스로를 아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이연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꿈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연이 태원에 도착한 뒤, 그 꿈에서 깨어난 것은 아닐까? 이제는 꿈만이 아닌 현실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꿈만으로 이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대업구년(大业九年) 바로 수양제가 고구려로 친정을 나갔을 때, 예부상서(礼部尚书) 양현감(杨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연은 양현감이 친지들을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전선에서 돌아오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의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곧장 전선에 있는 황제에게 보고를 하게 된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양제는 이연의 충성에 감사하며, 전방주력부대를 돌리고, 다른쪽으로는 이원에게 홍화군(弘化郡)의 군사를 맡게 하고, 지관우주군사(知关右诸军事)에 임명한다. 이는 장안(长安)의 북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연이 처음으로 군사력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양현감의 반란중에 이연이 보여준 충성은 매우 깊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두항(窦抗)은 이연 부인의 당형이었다. 또한 이연 본인과도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두항은 이연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여 천하를 손에 넣으라고 조언을 한다. 그때 이연은 "문제를 일으킬 발언을 하지 마세요(无为祸始,何言之妄也。)"라고 대답한다. 당시의 법률을 생각하였을 때, 두항의 발언은 모반의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연은 이 사실을 보고해야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비록 두항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정작 두항을 고발하지는 않는다.

이연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야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연이 태원에 도착하였다. 그는 조정세력의 대표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각지의 폭동을 진압하였다. 그는 심지어 70발의 화살을 연달아 발사해서 70명을 죽인 기록이 있었고, 조직적이지 않은 군중들이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의 야심과 꿈이 합쳐졌을까? 그가 진정 꿈을 위해서 노력을 시작했을까? 그의 일련의 모습을 보면 그러한 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는 아직 웅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의 반란과 침입을 막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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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s of the Great Wall

Nicola Di Cosmo -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Princeton (USA)


무지막지 간단한 요약

장성이 처음 세워질 때에는 어디까지나 중국 북방왕조에 의한 북방침략의 전진기지로서 작용하였다. 특히 과거의 최신식무기인 말의 사육을 할 수 있는 목장의 확보(지금으로 따지면 핵무기나 화학무기 제조공장밀집지대이다. 느낌이 팍팍 오지 않은가?) 오르도스로 유입되는 다양한 문화와 기술을 터득등을 목적으로 진, 조, 연은 장성을 정주민과 유목민의 분계선이 아닌 초원지역까지 끌고 올라갔다. 다시 말해서 장성의 처음 목적은 방어용이 아닌 공격용이었다.



개인적으로 놀랐다. 콜럼버스의 달걀이 바로 이런것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반론을 하자면--


하지만 辛德勇의 해석에 의하면 由于秦昭襄王长城在关中北部地段,距离秦都咸阳较近,匈奴骑兵一旦突破秦人防线,很容易对国都造成威胁。后来汉初又沿用这道长城作为边塞。汉都长安与秦都咸阳仅渭河一水之隔,近在咫尺,二者与秦昭襄王长城的位置关系基本相当 이런 해석도 충분한 방어적인 요소가 필요했다 것의 근거가 아닐까? (수도방어의 목적)


등장하는 辛德勇의 글은 모두 张家山汉简所示汉初西北隅边境解析—附论秦昭襄王长城北端走向与九原云中两郡战略地位에서 인용한 것이다. 文史 - 关于高阙的文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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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原和云中,具有非同寻常的军事地理地位;特别是九原,不仅控制着黄河渡口,同时还控制着重要的战略通道直道,地位尤其重要。尽管在秦末丧失“河南地”以后,直道有一部分地段沦入匈奴骑兵出没之区,不能正常使用其一般的交通功能;①但若是需要采取重大军事行动,这条大通道显然依旧可以发挥无以替代的作用。因此,九原、云中两郡,各自保持单独的郡级建置,自然有利于强化治理,提升地位,以确保其能够发挥应有的战略作用。同时,让这样两个郡比肩并立,也可以令其相互牵制,更有利于朝廷的控制。(북방이민족외에 관중에서 동쪽 지역으로 군사작전을 할 경우의 작전로로서의 가능성)


장성의 정의 : 해당 시대의 주요 국가가 국방상의 이유로 장기적으로 통합적인 구조에 의하여 만들고 유지한 건축물.


If there is a single Chinese monument that people anywhere in the world are likely to have seen, heard of, or read about, this is the Great Wall (Fig. 1). Aside from its mythical proportions, the Great Wall has symbolic powers that transcend its historical and material existence. It has been depicted as a parting line between the known and the unknown and the physical line marking the frontiers of civilization, the inhospitable liminal universe which was the preserve of a demimonde of barbarians and transfrontiersmen, convicts and soldiers, crafty merchants and banished officials. In historical writings, the Great Wall has been presented as protection against invaders — the engineering product of a superior civilization erected against the tumultuous waves of its enemies — but also
as the symbol of unrestrained, vain, and arrogant tyranny, tangible product of the blood and tears of the toiling masses. Most recently the Great Wall has acquired yet another meaning, following new orientations in the politics of historical interpretation: a meeting point of cultural exchange, compared to a river that unites rather than divides, and brings different nationalities closer together. A malleable symbol adapted to political and cultural metaphors, gate to be crossed or drawbridge to be lifted, the Great Wall of China continues to be a testimony of China’s cultural, historical, and now national identity: a most patriotic artifact.


Owen Lattimore probably was the first Western scholar to see the Great Wall more as an economic and environmental than a cultural boundary between nomads and settled people (Lattimore 1937, 1940). Arthur Waldron in his excellent study restored its historical dimension, exploding some of its myths (that it could be seen from the moon, for instance) and focusing on its construction during the Ming dynasty, in the fifteenth century, when the Great Wall became the majestic monument we can see today (Waldron 1990). Yet although the Ming Great Wall is a relatively recent creation, the concept of a Great Wall, or more correctly ‘long walls’ (chang cheng) has been in existence for a much longer time, going back to the late fourth century BCE. As astonishing as the spatial dimension of the Great Wall is, covering several thousand miles, it is its temporal aspect that has been key to its success as a symbol of patriotism and national pride, a line in the sand between barbarians and Chinese drawn even before China’s imperial unification.

BCE = Before Common Era : 공용시대 이전 = 기원전 (미국인 룸메이트도 몰랐던 단어라는...--)


Yet once we begin to consider the Great Wall as a historical artifact rather than as symbol, we are bound to recognize an altogether different picture. As a defense structure, its record is abysmally bad. It never prevented invasions, and it was expensive to build and maintain. The monumental futility of the Great Wall as a military installation has been demonstrated in especially stark terms during the Ming period, when massive investments did not prevent China from being attacked by the Mongols and eventually conquered by another northern people, the Manchus. China’s strategic culture seems to have favored static defense, and this may be one reason for the long existence of various types of border fortifications, and the Ming construction of the Great Wall as we know it. But was this always the case? Did the Great Wall always serve as a defensive structure? These are some of the questions I had to ask as I became interested in the early phase of the history of the frontier between China and the steppe.

만리장성을 흔히 방어적인 구조물이며, 그러한 방어적인 능력조차 떨어지는 구조물이다. 하지만 효과가 떨어지면서 수 많은 경비가 들어가는 구조물을 유지할 필요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민족적인 상징으로서의 형상물이다. 그 다음으로는 장성이 방어적인 구조가 아닌 공격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생각이다.


The theory that the northern walls were erected to defend Chinese states from the nomads is well known and continues to carry much weight today. As we shall see in greater detail below, Sima Qian’s narrative account of the historical relations between China and the northern nomadic peoples in chapter 110 of his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hiji, first century BCE) was based on the historical myth (an ‘invented tradition,’ some might say), according to which China and the north had been perennially at odds with one another, and that China had since the dawn of history suffered from nomadic invasions. This rationalization of what was in effect a late phenomenon, that is, the appearance of the strong unified nomadic empire of the Xiongnu, set the tone for the later Chinese understanding of relations with the north. According to this deeply rooted topos of Chinese historical thinking, which has been repeatedly asserted as recently as at the Symposium on the Great Wall held in 1994, China was weak and unable to oppose an adequate defense against the northern nomads, except for the Great Wall, which then became a symbol of resistance against all invaders (Waldron 1995). Concern for the historical ‘weakness’ of China visà-vis the nomads could not exist, of course, outside of a notion that regarded the nomads themselves as a positively aggressive, militarily superior enemy (as represented, for instance, in the Disney animated movie Mulan). As Sima Qian said, it was their innate nature to love war (Sima Qian 1993, p. 129).

Sima Qian=사마천=司马迁

Shiji = 사기 = 史记


The history of the northern frontier before the unification of China is obscure and often cast, in the earliest Chinese texts, in moralizing terms. The Chinese had already attained a high level of cultural sophistication, with music, rituals, moral norms, and especially writing. Those people who did not write, had different customs, and did not belong to the Chinese cultural and political sphere, were therefore regarded as uncivilized. Several passages can be extracted from the earliest historical documents which present the stor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ese and non-Chinese in terms of ‘civilized’ vs. ‘barbarians.’ Among the non- Chinese were, of course, northern peoples thought to be the ancestors of the warlike nomadic horsemen who were to become a major threat from the Han dynasty onwards. From the mid-eighth to the mid-sixth century BCE, Chinese states conducted a series of military campaigns in the north against peoples called Rong and Di. Sometimes these peoples retaliated but usually they were defeated, subjugated, incorporated, and eventually assimilated. This process was made easier by the understanding that certain rules of conduct in war (a code of honor, a sense of fair play) that were to be observed, at least theoretically, when the fighting occurred among Chinese polities, were no longer prescriptive in the case of foreign wars, where no trick or stratagem, no broken oath, no breach of loyalty carried a moral sanction or other undesired political consequences. Foreign peoples were conceived as resources, and their use as such was not only practiced by Chinese states, but also theorized.

Rong = 戎, Di = 氐


From the sparse textual evidence at our disposal we can see that the land and labor extracted from non-Chinese groups constituted a type of wealth often coveted by the Chinese states. Victories obtained against foreign peoples could serve the strategic purpose of intimidating potential enemies. Another doctrine — wrongly assumed to be pacifist — maintained that wars against foreigners had to be undertaken sparingly, because there was a risk that such ventures may weaken the state and expose it to attacks from other Chinese states. It was realpolitik, not moral values, that regulated the foreign relations between Chinese states and their neighbors. Generally
speaking, the political discourse about foreigners in pre-imperial China tends to justify expansion and conquest, which is exactly what happened. Looking closely at those statements that point to cultural differences, then, we find that such differences provide a political rationale that allowed for the expansion of Chinese polities.


Especially in the Warring States period (5th-3rd century BCE) the Chinese political and economic spaces continued to expand even though the number of independent states vying for power dwindled. The general trend was towards the creation of larger and stronger states, which expanded not only by swallowing up other Chinese states but also by expanding into external areas. If we look at the northern frontier, this trend is clearly identifiable as the states of Zhao, Yan, and Qin kept expanding and growing both militarily and economically. Setbacks occurred, but the general impulse was towards becoming stronger, and alien peoples, not integrated in
Chinese civilization, were a reservoir relatively easy to tap into. From pastoral people the Chinese imported cattle and sheep, wool, leather, horses, and pelts. Moreover, at this time the frontier economy became monetarized through the use of metals, such as gold objects possibly used as currency, and especially bronze coins. Military requirements may have played a key role, since pack animals must have been needed in increasing numbers for transportation during military campaigns as armies became larger and larger. Horses become especially important from the late fourth century BCE with the adoption of mounted warfare by Chinese states. In sum, archaeological but also textual evidence suggest a historical context, on the eve of the building of the very first ‘great wall,’ in which the northern frontier zone appears to have been increasingly valuable, in economic and strategic terms, to northern Chinese states.

Warring States period = 战国时代


As we know, the First Emperor of Qin, the one who in 221 BCE emerged victorious from the struggle among the ‘Warring States’ and unified China, was not the one who first erected walls. He merely expanded and unified a network of fortifications which existed previously and had been established by the states of Qin in the northwest, Zhao in the north, and Yen in the northeast (see map, Fig. 2, for the various ‘walls’). Given that the conventional theory holds that the early walls were built to protect China from the nomads, historians have tried to explain why the nomads would raid, attack, or invade those lands we conventionally call ‘Chinese.’ Generally speaking, scholars have produced a number of theories more or less persuasive, and more or less supported by the sources. Some have sought to explain the nomads’ aggressiveness, for instance, with a model of omadicsedentary
relations according to which nomads need to acquire resources from their agriculturist neighbors, and would resort to war or trade to obtain them. Owen Lattimore himself saw relations across the frontier strongly determined by competing societies that differed dramatically in terms of environmental adaptation and economy. Chinese scholars have seen also in the ‘imbalance’ in the development of the productive forces on both sides of the ‘great wall’ the source of conflicts originated by the less developed side, the nomads. At any rate, all theories converge to agree that the ‘great wall’ was built as a response to nomadic aggression. To test the truth of this general apparently unshakeable belief we then should ask a most significant question: what does the evidence actually say?


 


Surprisingly, there is no textual evidence that allows us to establish a direct cause-effect relationship between nomadic attacks and the building of the walls. The evidence shows, on the contrary, that the building of walls does not follow nomads’ raids, but rather precedes them. If a linkage can be established in terms of mere chronological sequence, the construction of the walls should be regarded as the cause, not as the effect, of nomadic incursions. Secondly, archaeological evidence does not support the contention that the walls were protecting a sedentary population, even less that they were protecting a ‘Chinese’ sedentary population. In fact, the early walls did not mark an ecological boundary between steppe and sown, nor did they mark a boundary between a culturally Sinitic zone and an alien ‘barbarian’ region. For the most part, they were entirely within areas culturally and politically alien to China. These simple observations should already suffice to raise doubts as to the actual function of the earliest walls. More doubts are engendered as we delve deeper into the textual and archeological evidence.

1) 건축학상으로, 그리고 실제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싶이,  만리장성으로 인한 방어적 효과는 없다

2)방어적 효과를 위해서라면 만리장성 안쪽에 다수의 정주민이있어야 되었는데 오히려 적은 수의 정주민이 있다

单纯从军事防御角度看,这道新的防线足以御敌于国门之外,庇护都城的安全。但它远离关中的边防线,又带来军粮供给困难的问题。秦人和西汉朝廷解决这一地区边防军用粮共有三种办法:一是从内地调运;二是移民实边,开发当地粮食生产潜力;三是让驻军就地屯田,自食其力。

이 말을 바꾸면, 해당 지역은 농사를 하기에 힘든, 어디까지나 초원지역이었다는 소리이다. 곧 정주민과 유목민의 분계선의 역할을 했다는 말은 성립을 하기 힘들다.

《汉书》卷28下《地理志下》叙述赵国分野,谓赵国“西有太原、定襄、云中、五原、上党”,又云:“定襄、云中、五原,本戎狄地。”라는 말이 있듯이 원래는 북방유목민의 영토였다.

一是汉朝在关中不封授诸侯王国,在关中以外秦汉人习惯称之为“关东”或“山东”的东部地区,凡是沿边区域,包括实际并没有遭受多少外患,其实算不上“外接于胡、越”的渤海湾西岸地区,都被设为诸侯王封国,而频频遭受匈奴侵扰的云中郡和本文所推定的九原郡却不在其中,直接隶属于西汉朝廷.

그렇다면 매번 공격을 받는 지역을 왜 계속 지키려고 했던 것일까? 정말 방어적인 정책이었다면 이 지역을 포기하고 후퇴하는 것이 좋았을터인데 말이다. 전국-진-한에 이르도록 이 지역은 다양한 문화를 수용할 수 있고, 당시의 전략무기인 말을 사육할 수 있는 초원이 있던 지역이다. 그러므로 북방이민족은 목장을 원해서 계속 쳐들어내려오고, 반대로 중국왕조는 군사무기 공장-_;; 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 것은 아닐까?

그에대한 보충 자료로서 《管子·揆度》 桓公问管子曰:“吾闻海内玉币有七策,可得而闻乎?”管子对曰:“阴山之礝碈,一策也"와  桓公问于管子曰:“阴山之马具驾者千乘,马之平贾万也,金之平贾万也."

礝 : 古同“碝”,次于玉的美石。“碝”= 像玉的美石

어찌되었든 인산부근은 말과 보석?!이라는 두가지의 당대의 인기상품?!이 있었다. 차지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The idea and technology of such ‘long wall’ military installations is first found in central and southern China and associated with states such as Wei and Chu in the fifth century BCE. The ‘walls’ built along the northern frontier constituted an integrated system of man-made structures and natural barriers. The careful choice and use of topography enhanced greatly the effectiveness of these fortifications. This system, in addition to the ‘walls,’ included small as well as relatively large forts, beacon towers, look-out platforms, and watchtowers. Typically, the walls were made out of stamped earth and stones piled up in layers to form a rampart, usually on sloping terrain, so that the outer part would be higher than the inner part (Fig. 3, next page). Moreover, along the walls archaeologists have discovered, at regular or irregular intervals, mounds of stamped earth that are probably the remains of elevated platforms or towers. On higher ground, such as hilltops or even mountain peaks, small stone structures have been found, in the shape of platforms, which are assumed to have served as look-out posts or beacon towers. On the inner side of the wall, at varying distances, we find a number of additional constructions,
in the shape of square or rectangular enclosures, whose walls are often made of stone, believed to be forts garrisoned by soldiers.


In mountainous terrain along precipices and ravines or narrow gullies, the man-made structures may be limited to a few towers and gates blocking a mountain pass. Roads on the inner side of these walls served the purpose of connecting the various garrisons with strategically important locations. Beacon towers, also placed on the inner side of the walls, were probably used to communicate between the various stations, although the system of communication is unclear (Fig. 4). Undoubtedly a complex system of couriers, postal stations, and checkpoints must have been operating, and the sheer number of structures and their spatial extension suggest that the efficient use of these early ‘walls’ required an extensive military presence.


고대의 성은 전망대(파수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For instance, on top of the wall built by Qin, for its entire length, we find three to four mounds (raised platforms) per kilometer, amounting to a total of approximately 6,300 separate structures. Throughout the line of the walls, on the inner side, we encounter ruins of military installations. Citadels and forts are distributed at a distance of three to five kilometers from each other, and their internal area may vary from 3,500 m2 to 10,000 m2. They are generally walled, though forts built on steep ravines and gullies do not have walls, as the natural topography provided sufficient protection.


Turning to the evidence provided by textual sources, some caveats need to be borne in mind. The first concerns authorship, or rather the historical and cultural context from which the sources themselves originated. Explicit mention of wall building activity by the northern states is found in the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hiji), authored by Sima Qian around the turn of the second century BCE, that is, over two hundred years after the first northern walls were built, and after about a century of wars between the nomadic empire of the Xiongnu and China. Sima Qian inscribed such a long and bloody confrontation in a historical pattern according to which China (variously indicated as Hua, Hsia, Zhongyuan, Zhongguo, or even ‘the land of caps and sashes’) and the nomads constituted two antithetic poles that had been at odds ever since the dawn of Chinese history. Within this pattern Sima Qian produced an ethnic genealogy, culminating with the Xiongnu, that held all the various ‘northern barbarians’ together as one coherent narrative unity. As a result he created a polarization between a unified north and a unified south and projected it into the past. Sima Qian also recorded names and events whose number and variety is in itself evidence of the political and ethnic complexity of the north. Hence, while it is essential to remember that the historical narrative of the northern frontier is, not, itself, neutral, one cannot use this argument simply to dismiss all that it reveals about China’s relations with the north during the Warring States period (for details, see Di Cosmo 2002, part IV).

사기를 적은 사마천의 역사적 배경을 주의하자. 사마천은 실제 장성이 처음 세워진 때로부터 200년정도가 지난뒤의 사람이다. 그동안 흉노라는 이름으로 북방이 통일되었고, 중국도 한왕조로 통일이 되어서 장성을 두고 남북의 대립구조가 만들어 진다. 하지만 사마천이 직접 적었듯이, 고대의 중국과 북방 모두에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존립하고 있었다.


Moving then closer to the question of the Great Wall, we need to ask whether the Shiji, as our most important historical text, supports an interpretation according to which the walls were established as a military defense. Or, to put it differently: does the historical evidence show a connection between nomadic threats and wall-building? As for the state of Qin, the record says that its king Zhaoxiang (306-251 BCE) began to build walls on the north-western border after a military campaign into that territory, which was inhabited by a non-Chinese people called the Yiqu Rong. The pretext of Qin’s expansion is attributed to a ‘scandalous’ series of events. Apparently the king of these Yiqu Rong had illicit intercourse with the Queen Dowager of Qin, who bore him two sons. Having grown displeased with the king, the Queen Dowager later deceived and killed him, assembled an army, and then proceeded to attack and destroy the Yiqu. Having conquered the Rong, Qin also expanded to the north into the territory within the Yellow River’s great bend, today’s Ordos region. In this way Qin acquired extensive new lands, which became subject to military administration, or ‘commanderies.’ Only then Qin ‘built a Long Wall to guard against the Hu.’ (Hu was a generic term to indicate nomadic steppe peoples.) The state of Yan was located in the north-east. During the reign of King Zhao (311-279 BCE), a general who had served as a hostage among the nomads made a surprise attack against the Eastern Hu. He defeated them, and forced them to retreat ‘a thousand miles.’ Yan then ‘built “long walls”’ and established commanderies ‘in order to resist the nomads.’ But this ‘resistance’ followed a military expansion well into nomadic territory. The third northern state, Zhao, also had conflicts with steppe nomads. The Shiji tells us that King Wuling ‘in the north attacked the Lin Hu and the Loufan [both of them are generally understood to be nomadic peoples – NDiC]; built long walls, and made a barrier [stretching] from Dai along the foot of the Yin Mountains to Gaoque.’ Thus, Zhao created an advanced line of fortification, deep into today’s Inner Mongolia, encircling the Ordos steppe, then inhabited by pastoral nomads. I could find only one passage that refers explicitly to a state’s need to protect itself against the nomads without this being linked to a previous Chinese expansion. This is from a debate that took place in 307 BCE at the court of the same King Wuling of Zhao during which the king strove to persuade his advisors to adopt cavalry and follow the example set by the nomads. The king said, ‘Without mounted archers how can I protect the frontier against Yan, the Hu, Qin and Han?’ In the context of the debate, however, the nomads (that is, the hu people) were not the only threat to Zhao, and throughout the whole speech it is evident that the ‘protection’ argument was accompanied by an even more pronounced expansionist argument. In any case, unlike the adoption of cavalry, the building of walls is not mentioned in connection with the protection from nomads or any other enemy.

Zhaoxiang = 秦昭襄王 or 秦昭王

Yiqu Rong = 義渠戎王

hao = 昭

King Wuling = 赵武灵王

Lin Hu and the Loufan 林胡 楼烦

Dai 代

Yin Mountains 阴山

Gaoque 高阙

与本文所论问题相关的赵国西北方边境,形成于赵武灵王“胡服骑射”之后。《史记》卷110《匈奴列传》载:“秦昭王时,义渠戎王与宣太后乱,有二子。宣太后诈而杀义渠戎王于甘泉,遂起兵伐残义渠。于是秦有陇西、北地、上郡,筑长城以据胡。而赵武灵王亦变俗胡服,习骑射,北破林胡、楼烦,筑长城,自代并阴山下,至高阙为塞,而置云中、雁门、代郡。”这道“自代并阴山下,至高阙为塞”的长城,就是赵国在其西北方的边界


특히 장성이 처음 지어질 시기, 전국시대에는 북방이민족에 대한 특별한 경계의식이 없었고, 때로는 서로 힘을 합하고, 때로는 싸우는 관계였다. 이런 관계는 "중국"이라고 불리는 내부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던 일이었다.

据《史记》卷6《秦始皇本纪》记载,始皇三十二年,“乃使将军蒙恬,发兵三十万人,北击胡,略取河南地”。翌年,蒙恬取得成功,“西北斥逐匈奴”。于是“自榆中并河以东,属之阴山,以为三十四县,城河上为塞……徙谪,实之初县。”《史记》卷110《匈奴列传》记载同一事件,云蒙恬“北击胡,悉收河南地,因河为塞,筑四十四县城临河,徙谪戍以充之”。所谓“河南地”,应当是指由秦昭襄王长城向外推延,直至黄河岸边这一广阔区域

《汉书》卷52《韩安国传》相关记载原文为:“蒙恬为秦侵胡,辟数千里,以河为竟,累石为城,树榆为塞。”

--> 어디까지나 중국 북방 왕국이 공격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료


This is the core evidential ground based on which scholars have argued that the northern walls had a defensive purpose, and had been erected as a protection against nomadic attacks. However, none of these statements says that walls were constructed as a result of, or as a response to, nomadic attacks on Chinese people. What they say is that the walls were built to ‘repel’ or ‘contain’ the nomads after the states had advanced deeply into their lands, had occupied their territory, and had set up military commanderies. The building of fortifications proceeded hand in hand with the acquisition of new territory, the transfer of troops to this region, and the
establishment of new administrative units. The states of Qin, Zhao and Yan needed to protect themselves from the nomads only after they had taken large portions of territory from them.

장성이 방어적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에 불과하다. 실제로 진, 조, 연이 이민족에 대한 방어가 필요해 진 것은 어느 정도 세력이 갖추어진 뒤였고, 장성은 그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Having examined the textual evidence, let us turn briefly to the archaeological context. The material culture of non-Chinese people in what has been called the Northern Zone is fairly well known. Archaeological excavations throughout the Great Wall region, reveal the presence of a large number of bronze objects, such as knives and swords, belt plaques, horse ornaments, and precious objects. Archaeologists and art historians have long recognized this as a fully separate cultural complex which developed continuously from at least to the second millennium BCE, and usually cite among its salient features a distinctive metallurgical production and stylistic idiom, in particular the ‘animal style,’ and connections with the greater Siberian and Central Asian ‘Scythian’ art. Some of the most precious objects, usually in gold, come from the Ordos region. The remains of the Chinese walls crop up for the most part in the middle of this area, across grassland plateaus and deserts or in rough mountainous country. Chinese Warring States coins, pottery shards, and lacquered objects have been found, but the Chinese presence here at this early time was limited only to sites connected with the wall fortifications themselves, showing that military colonies and troops were stationed in an otherwise ‘barbarian’ cultural environment. For sure the walls were not built between Chinese and nomads, but ran, from a Chinese viewpoint, through a remote territory inhabited by foreign peoples. Some of these peoples were incorporated within the perimeter of the walls, some remained outside.

오르도스를 포함한 장성지역은 다양한 문화와 기술들이 서방으로부터 유입되던 지역이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이를 받아들여야했다. 그러므로 장성은 중국과 유목민같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중국의 관점에서는)  외국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지역으로 사용되었다.

If we wish to understand the early function of the walls, it is on the Chinese soldiers that we should concentrate, not on the Chinese farmers. Why were the soldiers stationed so far to the north, in alien territory? The only conclusion that the evidence would support, in my view, is that the walls’ and soldiers’ presence in the northern regions is consistent with a pattern of steady territorial growth by the states of Yan, Zhao, and Qin. They developed the system of long lines of fortifications to expand into the lands of nomadic or semi-nomadic peoples, and fence them off. Soldiers defended this territory against nomadic peoples possibly expelled from their pastures. This military push created a pressure on nomads that in turn led to a pattern of hostilities. The walls, in other words, were part and parcel with an overall expansionist strategy by Chinese northern states meant to support and protect their political and economic penetration into areas thus far alien to the Chinese world. This is consistent both with the general trend of relations between Chinese states and foreign peoples and with the political, economic and military imperatives facing the Warring States in the late fourth century BCE. It was at this time that northern Chinese states began to pay attention to cavalry and to develop mounted warfare, and the local pastoral people were surely more suited to this task than the sedentary Chinese. The walls were, in other words, part of a system designed to enclose and establish exclusive access to a precious reservoir of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at a time when the bitter struggle among Chinese states had become deadlier than ever, and every state was striving to exploit any means likely to increase its chances of survival. The walls were meant as a barrier not only against dispossessed nomads but also against competing Chinese states. As such, the origins of the Great Wall are closely linked to a military and political project that will eventually result in the imperial unification of China. Recognizing the historical origins of the Great Wall does nor diminish its symbolic power, but hopefully makes it less susceptible to a purely ideological interpretation.

오히려 장성의 초기 설립목적은 전국시대 북방국가들의 확장을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역할이다. 중국 정주민은 장성을 이용해서 유목민의 목장을 침략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으로 나중에는 통일에 이르게 된다.




About the Author

Nicola Di Cosmo is Professor of East Asian History at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School of Historical Studies (Princeton, N.J.). His main interests are in the history of frontier relations between China and Inner Asia, and in the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of Mongols, Manchus, and other peoples of north and Central Asia. His books include: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The R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n History (2002); Warfare in Inner Asian History (500—1800) (ed., 2002); A Documentary History of Manchu-Mongol Relations (1616-1626) (coauthored with Dalizhabu Bao, 2003); Political Frontiers, Ethnic Boundaries and Human Geographies in Chinese History (coedited with Don J. Wyatt, 2003); and The Diary of a Manchu Soldi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2006).


원래 몽고어와 만주어를 배워서 박사 논문은 청대에 대한 논문이다. 그의 대부분의 논문이 기존의 것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친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은 보통 고고학자료이다. 문제는 그의 고문(중국어)능력이 비교적 높지 않은지라 논문에서 몇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이 점은 주의해서 원문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듯 하다.

References
Di Cosmo 2002
Nicola Di Cosmo.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The R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n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Jagchid and Symons 1989
Sechin Jagchid and Van Jay Symons. Peace, War, and Trade Along the Great Wall: Nomadic-Chinese interaction through two millennia.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9.


Lattimore 1937
Lattimore, Owen. “Origins of the Great Wall of China: A Frontier Concept in Theory and Practice.” Geographical Review, 27/4 (1937): 529-549.

--> 구해서 보아야될듯. 장성의 유목경계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Lattimore 1940
Lattimore, Owen. Inner Asian Frontiers of China. New York: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1940.


Sima Qian 1993
Sima Qian. “Shi Ji 110: The Accout of the Xiongnu.” In: Sima Qian,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Translated by Burton Watson. 2 vols. Rev. e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vol. 2, pp. 129-162. Note: the quotations above from Sima Qian are my own translations.


Waldron 1990
Waldron, Arthur. The Great Wall of China: from History to Myt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  장성을 역사의 대상으로 연구를 한 책. 중요한 책. 대부분이 명장성의 정치부호와 현실중에서의 군사 그리고 그것이 현대의 신화로 변화가 된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역사인류학계열. 예를 들어서 인민폐 내에서의 장성을 거론하면서, 예전에는 장성은 나쁜 부호였는데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좋은 부호, 심지어는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Waldron 1995
Waldron, Arthur. “Scholarship and Patriotic Education: The Great Wall Conference 1994.” The China Quarterly, 143 (1995): 844-850.


Xu 2001
Xu Pingfang. “The Archaeology of the Great Wall of the Qin and Han Dynasties.” Journal of East Asian Archaeology, 3/1-2 (2001): 259-281.



라티모어도 장성의 기원에 대해서 논문을 작성했는데, 지리적으로 분석하면서, 농업과 유목의 분계선으로 해석하였다. 이 논문은 매우 유명한데, 장성과 농업과 유목의 분계선을 포괄적으로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맨처음으로 중국의 농목충돌의 입장에서 장성을 이야기했다.



위의 이론대로라면 새로 해석 가능한 것들.

秦至西汉前期,匈奴是中原王朝在北方最大的边患,因此它也是秦朝重点防范的对象。이것은 흉노, 즉 유목민의 입장에서 좋은 목장(하영지)을 차지하기 위한 공격이 아니었을까?

“蒙恬死,诸侯叛秦,中国扰乱,诸秦所徙適戍边者皆复去。于是匈奴得宽,复稍度河南,与中国界于故塞。”所谓“故塞”,也就是旧时的边塞。此处所说的“故塞”,究竟是怎样的地理涵义,容下文再行详细阐述。这里首先来看一下西汉初年汉王朝在这一带的边防情况。- 辛德勇

여기서의 故塞의 해석을 다시 할 수 있다. 장성선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장성을 쌓기 전에 존재했던 선일 가능성은?


秦始皇统一六国之前,秦国的北方边界是秦昭襄王时期修筑的长城。这道长城经过学者们的研究和考察,除个别地段还需要进一步深入探讨之外,其总体走势大致已经清楚,一般认为,是由今甘肃岷县附近北行,至今甘肃临洮转而向东北蜿蜒延伸,斜贯今陇东、陕北的黄土高原,直至今内蒙古准格尔旗黄河岸边的十二连城附近。①

说详史念海:《黄河中游战国及秦时诸长城遗迹的探索》,《河山集》2集,北京:三联书店, 1981年,
第453—461页。彭曦:《战国秦长城考察与研究》,西安:西北大学出版社, 1990年,第1—235页。



반론의 가능성 - 폐기-_-;;

고대에는 식목의 북방한계선이 훨씬 높았다. 다시 말해서 해당 지역은 목장이 아닌 농장가능지역이었을 점에 대한 고증을 해볼 필요가 있다. ---》 이는 해당지역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으로 반론할 수 있으므로 통과



성 자체는 긴 구덩이(참호?!)가 발전된 형태이고, 초기의 형태는 홍수를 방어 혹은 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포유적의 경우 참호로 보호되어있다. ....

满洲如何演变为民族 - 论清中叶前满洲认同的历史变迁

北方民族史十论

姚大力

 

만주의 실제적인 연원보다는 그 관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연구.

서방에서는 이미 유행하는 연구방법이지만, 중국에서는 그리 유행하지 않는 방법.

 

-金“元”女真 得改为 金“源”女真

 

이런 이론은 그대로 몽고에 도입을 하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몽고의 구전설화를 이용해서 황제시대까지 그 근원을 찾아가는데, 기존에는 이러한 것이 구전설화의 정확성을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만주전공 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사용해놓고, 그 사람을 다시 부정했다. 부분에서 야오따리를 비평하였다. 그의 대부분의 내용은 다른 사람의 연구내용을 듣고서 그 구조를 이용하면서 더욱 발전된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의 결론을 가지고 문제삼는 학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의 연구방법에 대해서 그리 좋은 감정이 없다.

터키는 스스로 오스만제국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비하여, 중화민국의 손중산은 스스로를 청나라를 계승했다고 한다. 그런데 로마의 경우 많은 유럽의 나라들이 계승했다고 한다. 흐음...이런 차이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중국의 역성혁명적인 관념에서 내려온 것일까? 이건 중국의 특색인듯 한데?? 예를 들어서 몽고를 몰아내고서 몽고의 역사를 "지금에는" 스스로의 역사로 여기지 않는가?

 

민족주의 관련 저서

상상의 공동체

 

쓸만한 논문 생각 :

고구려나 발해의 불교유입과 그로 인해서 형성된 혹은 통치계급에게 이용되서 형성된 민족의식을 연구해볼 수 있지 않은가?

중국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보면 정말 신기한게 하나가 있다. 분명히 이 땅의 역사는 심심하면 분열을 하고, 다양한 "유전학상의 민족"들이 서로 융합되어서 구성되는듯하다. 그런데 마지막의 승리는 언제나 화하족이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 왜곡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문화로서 민족을 구성하는 중국의 특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나라나 북방이민족들은 단지 문화의 힘에 눌려서 물러나가거나 융합된 것일까? 그런데 조금 다르게 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글을 진지하게 듣지 말라.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위에 다시 한번 가정을 하는 글이다. 다시 말하지만 진지하게 듣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가정의 가정으로 적는 글이니 정확한 고증은 일단 패스하겠다. 그러니 이 글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1) 이명박 대통령에게 감사를...

최근 10년사이에 한국에서는 국민에게 "법률"과 "과학"공부를 시키려는 것 같다. 수도이전, 황우석사태, 탄핵 그리고 광우병까지 말이다. 역사학도로서 전혀 상관없는 두 가지를 공부해야되니 조금 짜증나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는 건졌다. 학문쪽으로 건진것이 아니라서 조금은 슬프지만, 술자리 안주용으로 쓰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상상"인듯 하다.

이번 광우병사태 덕분에 해당 이론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2) 각기 다른 유전자마다 잠복기가 다르게 나타난다.

출처 : Phenotype-genotype studies in kuru: implications for new variant Creutzfeldt-Jakob disease. (Proc Natl Acad Sci U S A. 1998 Oct 27;95(22):13239-41) 광우병과 사회적비용 중에서...


해당 그림을 이미 본 분도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현재 영국의 대다수의 광우병 발병자가 MM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해당 논문은 쿠루병이라는 식인풍습이라는 광우병과 유사한 병에 대한 연구 결과이다. 결론적으로 이종간의 전염에서 MM은 비교적 빠르게 발병을 하고, MV는 비교적 늦게 발병을 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영국에서 광우병 발병자가 줄어들고 있지만, 영국인의 유전자는 대다수가 MV이고, 앞으로 15년이후에 대규모 발병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다. 이것도 이번 광우병 문제에서 광우병으로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해당 사실을 아시려면 광우병과 사회적비용 으로 가보셨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해당 홈페이지의 글들이 이번 사태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중에서 가장 타당성과 신뢰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본인이 주목한 것은 이부분이 아니다. 다시 한번 도표를 보자.

MM의 주요 사망 연령을 보면 5살에서 14살 사이이다. MV는 비교적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20살 이상으로 생각하면 될것 같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를 퍼트릴 수 있는 수단 - 곧 성적인 능력이 형성되는 시기는 보통 15세 이후의 일이다. 만약 같은 전염병에 MM과 MV 두 집단이 동시에 걸렸을 경우, MM집단은 자식을 남길 수 없는 반면에 MV집단은 자식을 남길 수 있게 된다.


3) 타부는 도덕이 아닌 생존.

현재 인류 보편적으로 타부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근친상간과 식인풍습이다. 그리고 혹자는 이를 인간으로서는 반드시 지켜야될 태생적인 도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이 볼때에는 스스로 생존을 하고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경험적인 생존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친상간의 경우 자식이 미숙아 혹은 정신지체아가 나올 확율이 높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식인풍습은 왜 막았던 것인가? 도덕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인간을 본래 그런 존재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역사에서도 식인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자주 나온다. 특히 국가가 위태롭고 국민의 삶이 도탄에 빠지는 시기를 서술할때마다 나오는 것중에 대표적인 것인 "식인"이다. 인상에 남는 이야기는 자기 자식을 차마 잡아먹지 못해서, 서로 자식을 바꾸어서 잡아먹는다라고 서술한 부분이다.

핵심은 "인간은 인간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원죄라고 불러도 좋지만, 인간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인간을 먹지 않게 되었을까? 혹시 근친상간과 같이 긴 시간을 걸쳐서 형성된 원시인들의 경험적 지식으로 식인을 하게 되면 쉽게 죽을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아갔던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어떨까?


** 여기서부터 본인이 잘 모르는 관계로 가정을 하나 하겠다.

화하족 혹은 한족은 MV형 유전자이다. 그 외에는 MM형.

4) 선진시대의 경우

선진시대에 식인의 문화가 보편적이느냐 아니면 특수하였느냐라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일정정도 식인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상나라의 경우 흔히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주나라로 대표되는 화하족이 서쪽에서 밀고왔고 중원지방을 점령하고 점차 세력을 넓혀나간다. 이런 과정에서 식인으로 인한 전염병으로 정복이 쉽게 된 측면이 없었을까? 일단 이런 전염병의 능력?!이 점령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스페인과 포르투칼에 의한 남미점령이다.

쉽게 말해서 자연 환경이 급변할 시에는 농작물의 수확량이 줄어들고, 식인이 보편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하였을 때, 화하족은 식인을 해도 일단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연령에서 죽지만, 타민족은 자식을 낳기 전에 죽어버리게 된다. 특히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상주변혁기는 기후적으로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때로 기억한다. 특히 인구가 힘이었던 고대사회에서는 이런것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5) 위진남북조의 경우

위진남북조에서도 자연기후적인 변화로 농작물의 수확량이 줄어들고, 그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알다 싶이 중국 전국이 전란으로 휩쌓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식인에 대한 이야기가 보다 많이 나온다. 여기서 두가지 점.

북방유목민족에게 식인의 풍습이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료가 몇가지 있다. 석호가 사람을 죽이고 요리해서 먹었다는 말과 같은 경우이다. 물론 이것이 그의 포악성을 강조하기 위한 묘사일뿐인지 아니면 정말 그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식인풍습이 있다고 가정을 하자. 그렇게 되면 북방의 다양한 이민족 왕조가 쉽게 망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수도 있다.

그리고 남조에 의한 남방영토 확대가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전염병에 의한 점령이 있지 않았을까? 이것은 식인이 아닌 왕래가 자주 있어서 여러가지 전염병에 면역이 있는 한족과 원래 영토에 머물러 있어서 다른 전염병에 약했던 원주민의 문제로 생각해도 되겠지만, 일단 식인만 중심으로 생각해본 것이다.



이상...그냥 심심해서 적어내려간 글이었다. 설마 진지하게 이 글을 읽은 분은 없겠지? -_-;; 아는 분들이 보면 농담이고 잡상인지 알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이 보면 진지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서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이 글의 내용을 믿지 말라. 이건 근거가 미미하거나 없는 글이다.



契丹建国与回鹘文化的关系
王小甫
《中国社会科学》2004年第4期。正式发表时曾删去5000字,此处发布为作者提供的原稿全文

前言

一、阿保机的即位问题和降生神话

二、木叶山地望与“青牛白马”说

三、燔柴、祭东及其他

四、关于述律氏

结语

 

언어학에 대한 정확한 고증보다는 그럴듯한 말인듯 하다. 본인 언어학를 배우지 못하여서 정확하게 말을 못하겠다. 언어학 공부해야될듯 하다.

해당 논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억지로 북방민족 전통의 민속을 마니교에 부합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마니교 자체가 북방민족 전통을 포함하고 있으니 이 부분은 정말 조심해야할 것이다.

해당 논문이 여러방면으로 "상상"한 것은 고려해볼만한 글이지만, 정확한 역사적인 고증을 거치지 않은 추측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전통 사학과 민족학 연구와 합쳐져서 상당히 재미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성 연구를 하면 위험하다.

이 글이 아닌 투르크와 마니교를 이야기하면서, 문화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외부의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지는 정치적인 격변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회골 사람들을 거란이 받아들이면서 변화하게 된 것 중에서 종교적인 면(마니교)을 말하는 이 글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관명과 같은 다른 회골적인 요소를 이미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 해왔지만, 마니교가 아보기의 건국과 사망 그리고 그의 처(회골)과의 관계 모든 곳에 연관이 있다는 것은 이 글이 처음이다. 

이 글은 요사 연구의 정론은 아니다. 그러기도 힘들다. 하지만 강력한 상상력을 이 내용에서 발견하기를 바란다. 특히 왕샤오푸선생님과 롱신지앙 선생님 방법의 차이이다. 롱신지앙 선생님은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논문으로 써내지 않는데 비하여 왕샤오푸 선생님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내용을 적는다. 후자의 방법은 직접적인 정론은 힘들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학에서는 이처럼 다른 방법이 있다. 특히 민족사에서는 후자와 같은 상상력의 방법이 상당히 유행하고 있다. 이런 방법은 매우 위험하지만, 정확한 학문의 기초 아래서 이렇게 상상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문제점은 일본과 서양의 마니교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연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건 이 글과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王小甫 선생님은 갑자기 터키로 날라버리신 罗新선생님(너무하세요..ㅠㅠ) 대신에 나의 본과졸업논문 지도교수님이셨는데(그뿐만이 아니라 석사입학시험 면접관이시기도... 이래저래 인연이 있으신데...)....원한은 잊지 않겠습니다.-_-+ 아무리 본과졸업논문이 대충 휘갈겨 쓰는 것이라고 해도 저 나름대로는 죽어라 쓴건데 그걸 대충 보고 통과시켜주신 덕분에 답변때 괴로웠습니다. 차라리 먼저 때려주시지 왜 그러셨나요? ㅠㅠ 흐흑....

 

 

前言

契丹是我国的一个古代民族,曾经建立辽朝(916-1125)。最迟在北魏初年,契丹之名已见于文献记载[1]。最早为契丹立传的是《魏书》,传云:“契丹国,在库莫奚东,异种同类,俱窜于松漠之间。登国中,国军大破之,遂逃迸,与库莫奚分背。经数十年,稍滋蔓,有部落,于和龙之北数百里,多为寇盗。”[2]北魏破奚、契丹事,据《魏书·库莫奚传》在太祖拓跋珪登国三年(388)[3]。当时所谓契丹国,只是史书记载不同部族或地域的一种说法,并非真的建立起了严格意义上的国家体制。契丹建立国家已是其见于史料记载五百多年以后,即公元916年耶律阿保机“上尊号曰大圣大明天皇帝,后曰应天大明地皇后,大赦,建元神册”[4],废除契丹可汗的选举制,确立皇权世袭制,正式建立起专制主义的国家。
契丹族活跃于历史舞台五百余年才正式建立国家,这在古代北方民族史上是一个比较特殊的现象。我国古代北方活跃过许多民族,少数得以建国者大都是乍起乍兴,如匈奴、突厥、女真等;更多的是未能建国,作为部族群体活动一段时期便从历史上消失,并入或融合进其他民族或国家中去了。契丹作为部族群体活动了五百余年而没有泯灭,其间屡仆屡起,几经辗转演变,最后竟然建立起了自己的国家,这一现象堪称奇迹,值得研究。有关契丹长期发展的历史,前人做过许多工作,其中不乏有真知灼见的学术成果[5]。社会发展史理论长期为我国学界奉为圭臬,因而很多学者都探讨过契丹社会发展的内部原因[6]。至于契丹勃兴的外部条件,日本学者松井等认为,契丹长期受到周围强大民族的压力,直到晚唐时期,由于草原上的回鹘汗国崩溃,唐朝也因藩乱民变而精疲力尽,这才给了契丹崛兴的机会[7]。然而,除了这些客观原因和条件之外,历史发展主观力量的变化也是非常重要的,有时甚至是起决定性的革命作用的因素。换言之,耶律阿保机凭什么能够超越前人,变革传统,化家为国,从而成为契丹人的民族英雄,这些也有必要作些研究。从这个视角观察,我发现在阿保机建立国家过程和契丹国家生活中都有回鹘文化因素发挥作用。
关于回鹘族人在契丹国家和社会生活中的地位和作用,前人已经作过很好的系统性研究[8]。可是,以光明崇拜为特征的回鹘摩尼教文化[9]对契丹社会发展的影响,迄今还很少人提及。因此,本人不揣谫陋,将管窥蠡测之见撰成此篇,权作引玉之砖,请专家批评赐正。

一、阿保机的即位问题和降生神话

有关耶律阿保机即位称帝的原因,史料中记载了两种不同的说法:一种认为阿保机即位是受契丹八部的推戴,因久不受代被迫退位,遂用暴力及诈术统一契丹而称帝[10];另一种则认为阿保机得位于前任遥辇氏痕德堇可汗的遗命禅让[11]。前辈学者杨志玖先生很早以前就研究了这两种说法,认为八部和推戴都不可信,迭剌部的耶律阿保机之所以能得遥辇氏禅让并进而称帝,主要是迭剌部尤其是耶律氏在契丹内部长期发展壮大的结果[12],所谓水到渠成、实至名归。杨先生的考证深入细致,令人信服。我想说的是,无论是以什么名义,权力转手异姓都是对旧有传统的破坏,建立帝制世袭更是对氏族社会的革命。鼎革之际,阿保机只有取得“正统”才能稳定社会、安抚人心,孤立并消灭反对者。在这方面,“君权神授”是传统文化中能够提供的有力武器。史料中有关阿保机受遗命得禅让的记载正好反映了这种情况:
《辽史·太祖纪》上:

(唐天祐三年,公元906年)十二月,痕德堇可汗殂,群臣奉遗命请立太祖。曷鲁等劝进。太祖三让,从之。

同书《耶律曷鲁传》:

会遥辇痕德堇可汗殁,群臣奉遗命请立太祖。太祖辞曰:“昔吾祖夷离堇雅里尝以不当立而辞,今若等复为是言,何欤?”曷鲁进曰:“曩吾祖之辞,遗命弗及,符瑞未见,第为国人所推戴耳。今先君言犹在耳,天人所与,若合符契。天不可逆,人不可拂,而君命不可违也。”太祖曰:“遗命固然,汝焉知天道?” 曷鲁曰:“闻于越之生也,神光属天,异香盈幄,梦受神诲,龙锡金佩。天道无私,必应有德。我国削弱,齮龁于邻部日久,以故生圣人以兴起之。可汗知天意,故有是命。且遥辇九营棋布,非无可立者;小大臣民属心于越,天也。昔者于越伯父释鲁尝曰:‘吾犹蛇,儿犹龙也。’天时人事,几不可失。”太祖犹未许。是夜,独召曷鲁责曰:“众以遗命迫我。汝不明吾心,而亦俯随耶?”曷鲁曰:“在昔夷离堇雅里虽推戴者众,辞之,而立阻午为可汗。相传十余世,君臣之分乱,纪纲之统隳。委质他国,若缀斿然。羽檄蜂午,民疲奔命。兴王之运,实在今日。应天顺人,以答顾命,不可失也。”太祖乃许。明日,即皇帝位,命曷鲁总军国事。

可见,要实现异姓革命,光有遗命、推戴还不够,还要有符瑞,以昭示“天道”,绥辑人心。耶律曷鲁当众宣扬符瑞彰显“天道”以劝进,因而成了阿保机称帝建国的第一功臣。《辽史》的编纂者把曷鲁本传列在紧接后妃、宗室之后的第一位,确实是有道理的。

1) 몽고밀사의 쿠르치가 생각이 나는군.

那么,曷鲁宣扬的这些符瑞是从哪里来的呢?这个能够产生圣人、超越世俗传统的“天道”究竟是什么呢?我研究之后,以为应该就是崇拜光明的摩尼教。让我们先来看一看耶律阿保机的降生神话,《辽史》里除了上述《耶律曷鲁传》的说法外,还有《太祖纪》的记载:

唐咸通十三年生。初,母梦日堕怀中,有娠。及生,室有神光异香,体如三岁儿,即能匍匐。祖母简献皇后异之,鞠为己子。常匿于别幕,涂其面,不令他人见。三月能行;晬而能言,知未然事。自谓左右若有神人翼卫。

我发现,有关阿保机降生的这些神话应该大都仿自摩尼降生和受启神话。
敦煌出土《摩尼光佛教法仪略》第一章《託化国主名号宗教》略云:“当欲出世,二耀(即日月。——引者)降灵,分光三体:亲受明尊清静教命,然后化诞,故云光明使者;精真洞惠,坚疑克辩,故曰具智法王;虚应灵圣,觉观究竟,故号摩尼光佛。光明所以彻内外,大慧所以极人天,无上所以位高尊。则老君託孕,太阳流其晶;释迦受胎,日轮叶其象。资灵本本,三圣亦何殊?摩尼光佛诞苏邻国跋帝王宫,金萨健种夫人满艳之所生也。自胸前化诞,卓世殊伦,神验九徵,灵瑞五应者,生非凡也。《观佛三昧海经》云:‘摩尼光佛出世时,常施光明,以做佛事。’《老子化佛经》云:‘我乘自然光明道气,飞入西挪玉界苏邻国中,示为太子。舍家入道,号为摩尼。’”[13]据说“摩尼在12岁时,便得到神的第一次启示,第二次则是在其24岁时。”[14]当摩尼开始传教时,“有许多人是抵制摩尼的,而有些人则是倾向于他,承认他是一位真正的先知。他们说道:‘也许有一个声音秘密地对他讲话吧?他所说的就是这声音对他的启示吧?……有一个面容出现在他梦里吗?他所讲的就是他所看见的吗?’(《科隆摩尼古卷》86,10-16)”[15]不难看出,阿保机降生神话中的主要情节,如“母梦日堕怀”(=“当欲出世,二耀降灵”、“自胸前化诞”等),“神光属天”(=“光明使者”、“光明所以彻内外”、“出世时常施光明”等),“晬而能言、知未然事”(=“精真洞惠,坚疑克辩”、“虚应灵圣,觉观究竟”),“梦受神诲”等都能在摩尼降生和受启神话中找到原本。

기본적으로 동의를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다른 곳에서도 가져다 붙일 수 있지 않나?

阿保机降生神话中的另外几个情节也可以在摩尼教教义中找到依据。如:
“异香盈幄”,这应当是喻指摩尼教中拱绕明尊的五大神中的第一位——清静气[16]。五大神是指气、风、明、水、火这五种明亮的宇宙分子,都是摩尼教崇拜的对象。敦煌出土摩尼教《下部赞·叹明界文》有这样的赞颂:“宝树根茎及枝叶,上下通身并甘露,香气芬芳充世界,宝花相映常红素。彼国园苑广严净,奇特香气周园圃;瓦砾荆棘诸秽草,若言有者无是处”;“香气氛氲周世界,纯一无杂性命海,弥纶充遍无障碍,圣众游中香妙最。”[17]
“龙锡金佩”,当是喻指五大神中的第二位——妙风。风和气的区别在于,一个能听到声音,另一个能闻到气味。摩尼教《下部赞·叹明界文》里这样赞颂道:“妙风飘荡皆可悦,和畅周回遍十方,轻拂宝楼及宝阁,宝铃宝铎恒震响”;“讃呗妙音皆可悦,其声清美皆安静,上下齐同震妙响,周边伽蓝元不宁。其音演畅甚殊特,遍互歌杨述妙德。诸圣快乐皆究竟,常住恒安无疲极。”[18]
“左右若有神人”,这是摩尼教中的光明使者——拯救之神的形象之一。据研究,在摩尼教里,“耶稣、惠明使和大智甲构成了常被祈祷的三位一体”[19],而耶稣只是主神第三使的一个分身[20],惠明使则经常显示为女身[21],大智甲又叫瓦孟(Vahman),是所谓灵魂的引导者[22]。
吐鲁番高昌故城出土过一幅九世纪左右的摩尼教经文插图,“图左边的黑行字却包含有中古波斯语pdkr’i w?man一词,意为‘瓦孟图像’。从中亚的赞美诗中,我们得知瓦孟和摩尼教会有着一种密切而特殊的联系,他实际是代表了摩尼教会,是摩尼教主的化身。此图描绘全副武装的国王跪在高僧面前,我们把这位高僧设想为最高级的僧侣(或至少是一位较高级的主教),肯定是不会错的。国王和高僧互握右手,这在复杂的摩尼教象征手法中,也许和拯救的意义有关”;“停放在主教身上的灵魂是瓦孟(Vahman),即人格化了的教会精神,……作为灵魂的引导者,他把灵魂引到审判者面前,而审判者便是神本身。”[23]这幅“瓦孟图像”或者如研究者所定名的《国王图像》对我们理解阿保机降生神话中的“左右若有神人”这一情节很有帮助。因为,“在经常提及的摩尼教原始神话中,即使各段文字的意思不同,也能用同一幅图画来解喻”[24];而“审判之神(汉文摩尼教经谓‘平等王’。——译者)也可解释为个人自己的善行。这就显示了东亚摩尼教的特点。末日的审判和永恒的生活现在已经来临,已在进行。末日的事情已被部分地现世化、心理化、内在化了。国王的采用圣教就标志着他现在已经受到审判并被释罪了。”[25]显然,把阿保机神话为三位一体的拯救之神是因为此神在回鹘摩尼教中有拯救国王的事迹[26],借此形象可以暗示阿保机是得到拯救的国王。换言之,有此神迹就等于宣布阿保机是与生俱来的当然国王。
综上所述,阿保机降生神话的几乎所有情节都能在摩尼教神话和教义中得到印证。其实还不仅如此,在阿保机的一些重要举措乃至契丹习俗中我们也可以发现受摩尼教影响的痕迹。
我们已经看到,耶律曷鲁在当众讲完阿保机降生神话后接着就说:“天道无私,必应有德。我国削弱,齮龁于邻部日久,以故生圣人以兴起之。”在前述降生神话的背景下,这里所谓“圣人”很有可能是喻指摩尼教五大神中的第三位——明力。摩尼教《下部赞·叹明界文》:“金刚宝地极微妙,无量妙色相暉曜,诸圣安居无障碍,永离销散无忧恼。圣众严容甚奇特,光明相照体暉凝,将此百千日月明,彼圣毛端光尚胜。内外光明无暗影,妙体常暉千万种,游行胜誉金刚地,彼则无有毫厘重。”[27]由此可见,摩尼教的诸神、使者也都经常称作为圣[28]。试检《辽史》,阿保机也在多种场合被称为“圣”。如神册元年(916)他所上尊号为“大圣大明天皇帝”,而其受册之地称作“册圣林”[29]。《逆臣耶律辖底传》:“太祖将即位,让辖底,辖底曰:‘皇帝圣人,由天所命,臣岂敢当!’”[30]天赞三年(924)六月耶律阿保机当众预言自己的归宿,其中也有“圣主明王,万载一遇”,“良筹圣会,自有契于天人”[31]等语。还有阿保机的谥号,最初为升天皇帝,统和二十六年(1008)进谥圣元皇帝,重熙二十一年(1055)又加谥大圣大明神烈天皇帝[32]。
值得注意的是,阿保机称号里与“大圣”一道的还有“大明”,甚至“神烈”这样的字眼;而阿保机的回鹘皇后述律后的尊号则直接叫做“应天大明地皇后”,这就更增强了这些名号的摩尼教光明崇拜色彩。光明崇拜是摩尼教信仰的中心,其最高神称作“明尊”或“大明尊”,其理想世界称作“明界”或“光明界”、“光明王国”、“光明乐园”。摩尼教《下部赞·叹无上明尊偈文》:“我等常活明尊父,隐秘恒安大明处。高于人天自在者,不动国中俨然住。为自性故开惠门,令觉生缘涅磐路。巧示我等性命海,上方下界明暗祖”;“魔族永囚于暗狱,佛家踊跃归明界,各复本身妙庄严,串戴衣冠得常乐。”[33]同经《叹明界文》:“诸佛明使于中住,即是明尊安置处。光明普遍皆清净,常乐寂灭无动俎;彼受欢乐无烦恼,若言有苦无是处”;“无上光明世界中,圣众于中恒止住。彼诸世界及国土,金刚宝地彻下晖,无始时来今究竟,若言震动无是处”;“圣众齐心恒欢喜,演微妙音无停止,赞礼称杨无疲猒,普叹明尊善业威。”[34]
在这种情况下,可以认为,阿保机受禅即位第二年所建的“明王楼”[35],也有可能就是一个宫内的摩尼教礼拜场所。有意思的是,阿保机即位后的首次内乱就与这座明王楼有关。原来,阿保机虽然引用了相对先进的回鹘摩尼教文化从而得以名正言顺地取代遥辇氏,但契丹社会本身却还处在向文明社会发育的上升阶段,阿保机想以神化自己的办法改可汗世选为帝制世袭,损害了贵族传统的既得利益,于是首先引发了诸弟剌葛等人之乱。这场叛乱三起三伏,历时两年,其中有这样一个情节,《辽史·太祖纪》上略云:

剌葛引其众至乙室堇淀,具天子旗鼓,将自立,皇太后阴遣人谕令避去。上以兵追之。剌葛遣其党寅底石引兵径趋行宫,焚其辎重、庐帐,纵兵大杀。皇后急遣蜀古鲁救之,仅得天子旗鼓而已。其党神速姑复劫西楼,焚明王楼。上至土河,北追剌葛,命北宰相迪里古为先锋进击之。剌葛奔溃,遗其所夺神帐于路,上见而拜奠之。

前辈学者研究这段历史,曾经指出:“可见神帐在契丹部众中,殆有相当的信仰。”[36]神帐究属何物不得而知,但从其得而复失的过程可以看出,与之相关的明王楼应该也是与信仰有关的建筑。剌葛同党焚明王楼之举表明,当时的文化之争确实与权位之争有着非常密切的联系。过了一年,阿保机就在明王楼的地基上建起了开皇殿[37],又过了一年多,他就上尊号、建元神册,正式建立起了世袭帝制国家。
本节最后还是想赘言一句,诚如前人所注意到的,“梦日入怀”或“感日而孕”是中国北方和东北民族常见的英雄降诞神话[38]。我的研究至少表明,契丹人如果也有过这种传统的神话,那到阿保机时代也已经与回鹘摩尼文化实现了完全的整合,与其他民族的类似神话不可同日而语了。

二、木叶山地望与“青牛白马”说

除了阿保机的降生神话外,一些重要的契丹习俗也显示受到了回鹘摩尼教文化的影响,其中之一就是木叶山祭祀。下面我们就来分析、研究一下有关记载。《辽史·地理志》一,上京道“永州”条略云:

永州,承天皇太后所建。太祖于此置南楼。东潢河,南土河,二水合流,故号永州。有木叶山,上建契丹始祖庙,奇首可汗在南庙,可敦在北庙,绘塑二圣并八子神像。相传有神人乘白马,自马盂山浮土河而东,有天女驾青牛车由平地松林泛潢河而下。至木叶山,二水合流,相遇为配偶,生八子。其后族属渐盛,分为八部。每行军及春秋时祭,必用白马青牛,示不忘本云。

这是见于文献有关木叶山祭祀以及所谓契丹始祖的最重要的一条材料。然而,最近的研究表明,由于多种原因,这条史料中提到的木叶山地望、奇首可汗音义等迄今未有的解,白马神人与青牛天女相遇配偶的故事也还是迷雾重重[39]。其实早就有人认为,“青牛白马”神话不能考实,不过是阿保机取代遥辇氏即位后,“畏惧其他部人不服,遂捏造‘神人’、‘天女’的故事,以示迭剌与回纥人的合作,完全是顺天应人,换句话说,这完全是上帝的安排。”[40]近年又有人提出“契丹族源传说借自回鹘”[41]。这些看法未必尽皆妥当,却为解开谜团提供了有益的视角。
我无意于否定契丹民族有自己的始祖传说和图腾崇拜,我只是想说,《辽史·地理志》记载的上述传说并非就是原本,而很可能是在阿保机时代与回鹘摩尼教文化进行了整合的结果。
首先,我注意到,木叶山并非契丹始祖奇首可汗的降诞之地,神人天女所生也非契丹始祖而是繁衍八子。《辽史·地理志》一,上京道“龙化州”条略云:

龙化州,本汉北安平县地。契丹始祖奇首可汗居此,称龙庭。太祖于此建东楼。天祐元年(904),增修东城,制度颇壮丽。十三年,太祖于城东金铃冈受尊号曰大圣大明天皇帝,建元神册。

而《太祖纪》上记载,耶律阿保机在称帝建国前三年(913)曾“登都庵(菴)山,抚其先奇首可汗遗迹,徘徊顾瞻而兴叹焉。”[42]可见,龙化州与都菴山大致就是同一个地方[43]。所以,《太祖纪》赞曰:“奇首生都菴山,徙潢河之滨。”[44]显然,真正的契丹始祖的功业应该是在其居地龙庭建立的,将其祠祭徙置潢河之滨永州的木叶山只是顺应阿保机称帝建国的需要。因此,木叶山名为始祖庙实际当另有所祭,“青牛白马”也非关奇首可汗而另有所指。
其次,我发现,与木叶山有关的重要名号都反映了同一地理特征。《辽史·国语解》:“永州,其地居潢河、土河二水之间,故名永州,盖以字从二、从水也。”[45]尽管如上引《辽史·地理志》所说,永州为辽圣宗时承天太后所建,得名稍晚,但当地的地理特征应该是早就形成了的[46]。《地理志》说“太祖于此置南楼”,但阿保机营建四楼之说受到了有关专家的强烈质疑[47],故且勿庸置论。除此而外,我认为,所谓契丹始祖的“奇首”一名,也可以从当地的地理特征加以理解。“奇首”一语在契丹语中究为何义,迄今未有的解。但换个角度看,“奇首”可以是回鹘语eki sub/ekki süw[48]的音译,其意正是二水或两河。回鹘语词的这种读法正好可以由摩尼教的传播途径得到解释,众所周知,在回鹘部落中传播摩尼教的主要是中亚的商业民族粟特人,而词首元音脱落正是粟特语的特点。最著名的例子就是祆教大神Ahura-Mazda,在粟特语里变成了Xurmazta,再经他们传到草原上,就成了至今仍留在蒙古及东北民族传统信仰中的霍尔穆斯达(Hormusda)天神[49]。诚如是,所谓契丹始祖的“奇首可汗”一名,应该也是在徙置潢河之滨以后得到的,换言之,也是阿保机时代据回鹘摩尼教义命名的。

중국에서는 물은 곧 강이지만, 북방에서는 두가지는 분리가 되는 개념이다.

另外一个有关的地名是所谓耶律氏的郡望——漆水。刘浦江先生就其地望作了很多考证工作,尽管未能断案,却提出了有益的推测:“被契丹人视为耶律氏郡望的‘漆水’,应该到契丹人早期的活动区域内去寻找。我觉得,漆水郡的得名之由,可能类似于女真完颜氏的郡望金源郡,金朝并没有一个称为金源郡的地方行政建制,这个郡望源于女真部的发祥之地按出虎水,漆水也应该是这样的一条河。如果做一个大胆的猜测,漆水也许是潢河或土河的别名,或者是它们的某一支流?”[50]可以说,刘先生的猜测近乎圆满成功,只要把“漆水”作为回鹘语词的译音,谜底即可解开。我认为,“漆水”与“奇首”一样,都是回鹘语eki sub/ekki süw一词的音译,只是用于不同场合选择了不同的译音用字而已。其义也是二水或两河,其地就在始祖庙所在的木叶山一带,即后来的永州。有了阿保机时代的一系列运作,这里作为耶律氏的郡望可说是名正言顺。
最后,木叶山一名本身也可以从上述同一视角加以考察。《新五代史·四夷附录契丹传》:“其居曰枭罗个没里。没里者,河也。”[51]我认为,“木叶”一语也有可能是契丹语“河水”一词的音译。我们可以比较一下这两种译音:没里,《广韵》音可拟测为mu?t l??;木叶,《广韵》音可拟测为muk j??p[52]。贾敬颜说:“没里,自是蒙古语的mure[n]”[53]。两种译音与原词读音相比较,唯叶字余母读音稍有距离,但也并非不可转通。例如,郭锡良《汉字古音手册》就把上古音“馀母改称余母,拟音依王力先生新近的意见改为?,是与?部位相当的边音。”[54] ?即日母。汉语上古声母舌头音端(t)、透(t’)、余(?)、定(d)、泥(n)、来(l)同类邻纽,泥(n)、日(?)则为准双声,都有可能发生音转[55]。虽然这是汉语上古音的情况,但在不同民族语音对译的时候,发生这种情况也是可能的。例如,蒙古语的“河”这个词,在蒙元早期的文献中就曾被音译作“木辇”[56],元初编写的《至元译语·地理门》中则音译作“木连”[57]。因此,以“木叶”音译蒙古语从而契丹语的muren“河”也是可以的。契丹语一般被认为是一种古蒙古语[58],而蒙古语“可数名词不带复数附加成分时数的范畴不确定,它既可以表示单数,也可以表示复数。”[59]因而,“木叶”也可以是契丹语两河、众水之意,与奇首、漆水这些回鹘语音译词意义全同,也与汉文永州的寓意一致。

由此可见,木叶山一名本身就指明了它的地望,就在前引《辽史·地理志》所明确记载的“东潢河,南土河,二水合流”之处,这是无可怀疑的。降至辽兴宗时代,这里甚至直接有了所谓“木叶山辽河神”,《辽史·礼志》一说:“兴宗先有事于菩萨堂及木叶山辽河神,然后行拜山仪”。问题在于,这里实际上并没有山[60],所以我以为这个“山”字应当另求别解。我注意到,《辽史·礼志》首列“祭山仪”,就是所谓木叶山祭祀,然而其中根本看不到山的影子。据《礼志》,祭山仪的主要活动有四项:祭奠天神、地祇牌位,绕行通过神门树,祭东(敬日崇东,详见下文),再奠于天神、地祇牌位[61]。整个祭祀活动以天神、地祇为起止,可以肯定完全是一次祭天活动,根本与山无关,也不是在山上进行的。考虑到传统礼典都是以吉礼祭天开始的这一特点[62],我也想作一大胆推测:所谓“祭山仪”就是契丹特色的祭天仪,而且所谓“山”就是汉语“天”字的音讹;木叶山就是木叶天,即在两河口祭天;再由其祭祀内容转指祭祀地点,这种做法和早先史料所见把祭祀胡天神的地方称作胡天[63]是一样的。契丹国初文物寡少,很多制度称谓都借自汉语而音讹,如敞稳/常衮=将军,详稳=相公,令稳=令公,敞史=长史,大石=太师,等等[64]。我想,祭山仪的名称也是这样产生的,木叶山更是以讹传讹。我用数据库软件遍检《辽史》,发现与木叶山有关的文字没有一处描写过它的山势,可见它根本就不是一座山,把它说成是山不过是后世文人由字面产生的联想而已。
我进一步怀疑木叶山的所谓祭山仪其实是一种整合了契丹祭天旧俗的摩尼教宗教仪式。如仪式中要“偶植二树,以为神门”[65],而“摩尼亦常以两种树来表达二宗的概念,一曰光明活树,二曰黑暗死树。……根据(吐鲁番)柏孜克里克发现的一幅摩尼教壁画,我们得知摩尼所说的生命树的形状,其花果繁盛,有三根树干,象征着光明王国所占的三个方向(即北方、东方和西方,详见下。——引者)。”[66]还有,从《辽史·礼志》的记载可以看出,祭山仪始终贯穿着敬日崇东的强烈意识,这很可能是摩尼教有关灵魂最终经由日宫回归光明天国教义的反映。那么所祭天神很可能就如“木叶山”这一名称所指示的——水之天神,喻指摩尼教五大神中的第四位——妙水,这里的地理特征最适合于显示对水的崇拜。摩尼教《下部赞·叹明界文》:“百川河海及泉源,命水湛然皆香妙,若入不漂及不溺,亦无暴水来损耗”;“彼界宝山亿万种,香烟涌出百万般,内外光明身清净,甘露充盈无边畔。泉源清流无间断,真甘露味无浑苦;圣众充饱无欠少,若有渴乏无是处。”[67]这位尊神也就是阿保机费尽心机迁来此处加以神话的始祖——奇首可汗。当然,阿保机神话始祖,根本在于神话自身。
天地同祭可能是契丹旧俗,但天神、地祇并列也可以在摩尼教神话里找到比附的依据。如前所述,在摩尼教里,耶稣、惠明使和大智甲构成了常被祈祷的三位一体,但耶稣只是主神第三使的一个分身,惠明使则经常显示为女身,大智甲即瓦孟(Vahman)既是灵魂的引导者,又可喻指得到拯救的国王。这一神话既可解说祭山仪中天神、地祇一神二相的问题,也可解说始祖传说中奇首可汗与可敦异性配偶的问题,更妙的是,还可以与阿保机降生神话(“左右若有神人”)联系起来,从神统和法统两个方面进一步强化阿保机的形象和地位。
理解所谓契丹始祖神话“青牛白马”说的关键在于,被阿保机神话了的始祖奇首可汗与所谓白马神人与青牛天女繁衍八子属于两个完全不同的层次范畴,阿保机的始祖是天神,而象征契丹族的“八部”[68]始祖即繁衍八子是凡人。我认为“青牛白马”并不是天神地祇,主要理由是:
1、据宋人王易《燕北录》记载,有“赤娘子者,番语谓之‘掠胡奥’,俗传是阴山七骑所得黄河中流下一妇人,因生其族类。其形木雕彩装,常时于木叶山庙内安置,每一新戎主行柴册礼时,于庙内取来做仪注,第三日送归本庙。”[69]诚如刘浦江先生所断言:“这个所谓的‘赤娘子’,显然就是青牛白马传说中驾青牛车泛潢河而下的天女。”[70]而同时木叶山庙内还有奇首可汗、可敦形象,可见所谓青牛天女并非地祇。查契丹“柴册仪”仪注中有“又置再生母后搜索之室”,而且开始也是仪式上唯一的偶像[71],赤娘子应即指此,寓意受册可汗在人间再生。
2、《辽史·太祖淳钦皇后述律氏传》(注意:这位就是耶律阿保机的回鹘皇后,详见下):“后简重果断,有雄略。尝至辽、土二河之会,有女子乘青牛车,仓卒避路,忽不见。未几,童谣曰:‘青牛妪,曾避路。’盖谚谓地祇为青牛妪云。太祖即位,群臣上尊号曰地皇后。”显然,童谣是一个谶语,暗示述律氏即始祖传说中的可敦、祭山仪中的地祇,连青牛妪(=赤娘子)见了她都要让路,因而做地皇后是天道使然。倘若青牛妪本身就是地祇,那她为什么要给述律氏让路,述律氏又算是那路尊神?可见,说“谚谓地祇为青牛妪”完全是后来的修史者不明究里,强作解人,节外生枝,徒然添乱。顺便说说,据研究,皇后在契丹语里称“忒里蹇”,尊称曰“耨斡么”,称“可敦”是突厥及回鹘的称呼[72]。这适为所谓奇首可汗、可敦名号产生于耶律阿保机娶回鹘人(摩尼教徒)为妻时代的说法添一佐证。
3、最不可理解的是契丹祭祀经常杀青牛白马作牺牲[73],如前引《辽史·地理志》所谓“每行军及春秋时祭,必用白马青牛,示不忘本”。台湾学者王民信早就指出:“杀青牛白马以祭祀,是一件不合常理的情形。青牛白马既有功于契丹氏族的创建,何以一定要杀之才能‘示不忘本’?按突厥民族自以‘出诸狼种’,故‘旗纛之上施金狼头……盖本狼生,志不忘本’。是突厥并未杀狼以祭祀。又满洲先世范察为鹊所救,亦未见满洲人射杀鹊以祭天,示不忘本。今契丹人刑有功于族人的青牛白马以祭天,实在是违背常理,更何况《通典》及两《唐书》均未载此故事。”[74]尽管古代北方及东北民族不乏以白马告祭的例子[75],但绝不因为它是象征始祖的图腾,更非因其代表天神。牺牲的本意是取悦祭祀对象,岂有专以祭祀对象的代表或象征作为牺牲之理?
总之,这种介于神、人之间,既与种落起源有关又须以牺牲献祭的方式予以否定的现象非同一般。由于与白马同时牺牲的还有青牛,因此有必要考虑整合了传统的其他文化因素。冯家升先生早年曾撰《契丹祀天以青牛白马之解释》,提出:“所谓一男子、一妇人,非若犹太之亚当、夏娃乎?”[76]可惜冯先生没有展开论述这一观点。其实,如果考虑到回鹘摩尼教文化的因素,将白马神人和青牛天女比作亚当、夏娃是最合适的一种解释方式。
据研究,摩尼教认为:为了阻止光明分子得到拯救,黑暗魔王造出一对恶魔来吞食其他动物,以收集其体内的光明分子加以禁锢;这对恶魔成为配偶,却按明使的形象生下一对肉身,这就是人类的始祖亚当和夏娃;亚当和夏娃肉体虽是黑暗物质构成,灵魂却是由光明分子组成的。摩尼认为,人类的身体就是一个小世界,里面既有光明分子,也有黑暗物质;黑暗物质为首的便是贪欲,它促使人类的生殖,以确保光明分子世代被人体禁锢不得拯救。无论如何,人类的繁殖过程便由亚当、夏娃开始了,于是使光明分子持续地被禁锢在人体之内。黑暗魔王的这一做法使拯救恢复光明的工作更为复杂困难,大明尊不得不派更多的天神明使来做拯救工作。由于人类是暗魔的子孙,而这些子孙的灵魂却是由光明分子组成的,这就形成了拯救人类灵魂的程序问题:拯救之神先将人的灵魂运到月宫去锻炼,锻炼纯净的灵魂再转到日宫去,最后回归光明王国。[77]
很明显,在这样的教义中,青牛白马作为种落始祖的象征用于向天神献祭,祈愿原罪得到解脱、灵魂得到拯救等等,真是再合适不过了。如果考虑到所诉求的拯救之神实际上是喻指阿保机的祖先从而阿保机本人,对始祖传说的这种宗教改造就更有意义:传说的父子关系变成了宗教的神人关系,世俗的统治问题变成了宗教的拯救问题。这种摩尼教教义比起那种以青牛白马为天神地祇,可汗和所有的契丹人一样都是神族后裔的说法,正在谋求即位和称帝的革命家耶律阿保机会选择哪一种呢?我想答案是不言而喻的。
本节最后想再为“青牛白马=亚当夏娃”说提供一条证据。前引宋人王易《燕北录》提到:“赤娘子者,番语谓之‘掠胡奥’,俗传是阴山七骑所得黄河中流下一妇人,因生其族类。”赤娘子已经刘浦江先生考证为青牛天女,此不赘述。“掠胡奥”自是传说始祖的名称,我怀疑起首的“掠”字可能是“椋”(读 liang)字形近致误, 椋胡奥即是当时对Adam Hawwah亚当夏娃的音译。如前所述,摩尼教是经中亚的粟特人传给回鹘人的,词首元音脱落是粟特语的特点;古代汉语d、l同类邻纽(发音部位相同而方法略有差异),可能发生音转,更何况是音译外来词,所以[A]dam Hawwah就被听成椋胡奥而被记了下来。因此,椋胡奥很可能是中国古代对西方传说人类始祖亚当夏娃的最早译名之一。这也从一个侧面证明文献记载的契丹始祖“青牛白马”说已经在阿保机时代与回鹘摩尼教实现了整合。

三、燔柴、祭东及其他

我们看到,除了阿保机降生神话、契丹始祖神话之外,还有一些契丹的重要习俗如祭山仪——木叶山祭祀也受到了回鹘摩尼教文化的影响。因此,与这些习俗相关的一些礼仪、活动应该也会受到同样的影响,本节拟就此进一步加以探讨。
契丹有所谓“柴册仪”,《辽史·国语解》:“柴册,礼名。积薪为坛,受群臣玉册。礼毕,燔柴,祀天。阻午可汗制也。”这是相当于汉仪中“皇帝受册仪” 的契丹旧俗,看得出来,名为“阻午可汗制”,也已经与汉仪有所整合,故《礼志》注文:“又有《上契丹册仪》,以阻午可汗柴册礼合唐礼杂就之。”[78]我认为,这里的“燔柴”活动值得注意。燔柴意在告天,其意或可当唐礼之“燔燎”[79]。问题是,契丹燔柴经常单独进行,非如汉仪唐礼仅为仪注之一,如台湾学者王民信所揭示:“太祖六年,因诸弟迭剌、寅底石、安端等反,太祖引军南趋十七泺,燔柴;次年乱平,亦燔柴;太宗会同三年,率百僚谒太祖行宫,第三天即燔柴,礼毕,再祠于神帐。(这些)燔柴时因无‘上尊号’与‘即皇帝位’,与柴册礼的‘燔柴,祀天’似乎拉不上关系,不过,此一仪式必定很重要(则)属实(疑‘燔柴’时似应有祀天的仪式,纯粹是欢乐的庆祝活动)。”[80]所以,仅就燔柴这一行为而言,显然是一种对火的崇拜。
据《辽史·礼志》记载,契丹涉及拜火的礼仪均属吉仪,如爇节仪,“及帝崩,所置人户、府库、钱粟,穹庐中置小毡殿,帝及后妃皆铸金像纳焉。节辰、忌日、朔望,皆致祭于穹庐之前。又筑土为台,高丈余,置大盘于上,祭酒食撒于其中,焚之,国俗谓之爇节。”[81]据研究,爇节即俗所谓“烧饭”,其事辽、金、元三代相承[82]。显然,爇节或者说烧饭表现的也是一种对火的崇拜,它很可能源于更早的事火习俗,经过演变已经发展成隆重的礼仪。可以肯定,对火的礼敬并不表示对死人的崇拜,而主要是与灵魂升华的祈愿有关。有研究表明,在一些北亚民族的传统观念中,火神与死神是明显对立的,火神是生命的象征和代表者,因而是死神的对头[83]。
契丹也有火神,“岁除仪:初夕,敕使及夷离毕率执事郎君至殿前,以盐及羊膏置炉中燎之。巫及大巫以次赞祝火神讫,閤门使赞皇帝面火再拜。(原注:初,皇帝皆亲拜,至道宗始命夷离毕拜之。)”[84]这些列入国家礼典、由皇帝亲事的拜火行为,已经不是一般的传统民俗,而是反映系统宗教观念的祭祀活动。考虑到契丹建国的历史文化背景,我认为,契丹的所谓火神应该就是回鹘摩尼教的火神,即摩尼教五大神中的第五位——妙火。摩尼教《下部赞·普启赞文》:“又启五等光明佛,水火明力微妙风,并及净气柔和性,并是明尊力中力”;《叹明界文》:“光明妙火无可比,妙色清凉常暉曜,赫尒恒存不生灭,奇特暉光实难类。火体清虚无毒热,触入于中不烧煮,彼无灰烬及烟煤,若言焚燎无是处。”[85]
从《辽史·礼志》的记载来看,在契丹国俗的各种仪式上,多有巫及大巫参赞其事,如祭山仪,“太巫以酒酹牲”,祭东时“巫衣白衣,惕隐以素巾拜而冠之。巫三致辞,每致辞,皇帝、皇后一拜,在位者皆一拜”;瑟瑟仪,“巫以酒醴、黍稗荐植柳,祝之”;拜陵仪,“巫赞祝燔胙及时服,酹酒荐牲”;丧葬仪,“巫者袚除之。诘旦,发引,至祭所,凡五致奠。太巫祈禳”。这些巫和大巫显然是因为对有着浓厚宗教意味的仪式仪轨非常熟悉才得以参赞其事,所以我认为,他们很可能就是摩尼教的僧侣。之所以称之为巫,或因其本来就是巫师改宗摩尼,或因其行为举止在修史的文人看来有同巫术。
白衣素服也是摩尼教的显著特点之一。据研究,“尚白是摩尼教徒的一个特征。《摩尼光佛教法仪略》言摩尼‘串以素帔’,‘其居白座’,规定摩尼教信徒的前四个等级‘并素冠服’,即要穿白衣戴白帽;在高昌发现的摩尼教壁画所绘的摩尼教僧侣亦正是着白色冠服;宋代文献亦着意记载当时的摩尼教徒着白衣,称之为 ‘白衣道’、‘白衣师’等;阿拉伯阿拔斯朝时代(750-1250)国内的摩尼教徒亦均以白色‘无边沿帽’为标志。既然中国内地、高昌、阿拉伯国家等各地的摩尼教徒都尚白,这个习惯就不是到了中国或后来才有的,而应是一早就具有并传袭下来的特征。”[86]所以,《辽史·太祖纪》上记载,七年春正月“弟剌葛等乞降,上素服,乘赭白马”受之,也可以看作是阿保机宗奉摩尼的证据。契丹人也尚白,作为游牧民族尤其喜欢白马,除了前述经常与青牛一道用作牺牲的白马外,还有专门作为祭祀对象的白马神[87]。以白马为地名也有多处,如白马埚、白马淀[88]、白马泺[89]、白马山[90]等。《地理志》一记载,永州木叶山还有“兴王寺,有白衣观音像。太宗援石晋主中国,自潞州回,入幽州,幸大悲阁,指此像曰:‘我梦神人令送石郎为中国帝,即此也。’因移木叶山,建庙,春秋告赛,尊为家神。”[91]这与摩尼教明使女身和女选民(僧侣[92])多白衣形象的情况[93],很难说是偶然的巧合。可以说,契丹人传统尚白的心理,至少从阿保机时代起已经受到了摩尼教习俗的熏染。

아니 하얀말을 탄다고 다 마니교로 몰아붙이면 어쩌라는건가?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然而我们知道,如此尚白的契丹人却有一个重要的习俗——拜黑山,这是怎么回事呢?让我们先来看一下史料,《辽史·礼志》六“岁时杂仪”条:“冬至日,国俗,屠白羊、白马、白雁,各取血和酒,天子望拜黑山。黑山在境北,俗谓国人魂魄,其神司之,犹中国之岱宗云。每岁是日,五京进纸造人马万余事,祭山而焚之。俗甚严畏,非祭不敢近山。”[94]日人鸟居龙藏早对“犹中国之岱宗”的说法作过辩驳,以为契丹黑山信仰与早先的乌桓赤山信仰一样,同属东胡民族传统,俱为归依黄泉国思想的表现[95]。其实,尽管以色彩词汇作地名常用词是北方民族的习惯[96],可是汉语直译为“黑”的Qara这个词在其传统文化中还有特殊的含义。《伊斯兰百科全书》(新版)“黑汗王朝”(Ilek Khans or Qarakhanids)条援引德国东方学家普里查克(O. Pritsak)在其《Qara,突厥语缀字符研究》里的说法:“Qara字面的意思是‘黑’,但在早期突厥语里也用于指方向的原初点即北方,从而获得了 ‘首要的’、‘主要的’等含义。”[97]由此可见,用于专名的这个“黑”字即Qara(音译为“哈剌”或“喀喇”)常常并没有表颜色的用意,更不表明对黑色的喜尚,而只是用作修饰,以传统方式显示中心词的首要地位、伟大性质、崇高形象等,如喀喇昆仑=高大昆仑、哈剌契丹=伟大契丹、阿穆尔=大河[98],等等。因此,史料中关于“黑山在境北,俗谓国人魂魄,其神司之”的记载值得特别注意。
鸟居龙藏曾经实地考察当地古迹,认为黑山、黑岭(今内蒙古巴林右旗与西乌珠穆沁旗间大兴安岭)确实是契丹边界的最北位置[99]。但他认为“国人魂魄,其神司之”(所引《使辽录》为“云虏人死,魄归此山”)即是所谓“黄泉国”却令人难以苟同。关键在于他没有解释,如果真是契丹人精神世界中的魂魄归宿,那为什么一定要是北方?这个问题在“黄泉国”一类的神话里是找不到答案的。可能的解释是,东胡民族的习俗传说由乌桓的赤山变成契丹的黑山,并不仅仅是一种颜色的改变,而是崇拜方向和性质的改变;北方是天堂,这是契丹人从回鹘摩尼教中得到的观念。如前所述,“摩尼亦常以两种树来表达二宗的概念,一曰光明活树,二曰黑暗死树。……根据(吐鲁番)柏孜克里克发现的一幅摩尼教壁画,我们得知摩尼所说的生命树的形状,其花果繁盛,有三根树干,象征着光明王国所占的三个方向。”[100]这三个方向即北方、东方和西方。“照摩尼神话的基本说法,当初那个永恒的光明乐园,囊括了北方、东方和西方。仅有南方才为黑暗王国所据有。光明王国被大明尊所统治,居住着他所产生的神灵,这些神灵融洽地和他生活在一起。”[101]按照摩尼教教义,光明王国也是善良灵魂的最终归宿[102]。所以,契丹拜黑山,其实是以传统方式(黑=北方、首要、原初)表达对死后魂归最高天国的向往,而不是对命归黄泉的哀伤。

해당 마니교의 생명수에는 유라시아의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것을 단지 마니교로 몰아붙이는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与此密切相关的就是契丹人的祭东即敬日崇东的习俗。如前所述,契丹祭山仪始终贯穿着敬日崇东的强烈意识,我认为这很可能是摩尼教有关灵魂最终经由日宫回归光明天国教义的反映。现在我们进一步对此作些分析。《辽史·国语解》:“祭东:国俗,凡祭皆东向,故曰祭东。”又有专门的“拜日仪:皇帝升露台,设褥,向日再拜,上香。门使通,阁使或副、应拜臣僚殿左右阶陪位,再拜。皇帝升坐。奏牓讫,北班起居毕,时相已下通名再拜,不出班,奏‘圣躬万福’,又再拜,各祗候。宣徽已下横班同。诸司、閤门、北面先奏事;余同。教坊与臣僚同。”[103]关于契丹敬日崇东的习俗,前人已经做过研究,主要的问题有两个:一是契丹人敬日崇东的原因,一是契丹人是否日月并祭兼拜[104]。
关于第一个问题,冯家升先生曾提出:“考敬日崇东之俗,不惟契丹人有之,凡内地北方人民,几莫不然。盖以彼等环境相同,故于风俗习惯,类多相似。塞北气候寒冷,人所共知。日升则温,日没则寒。一年之中,温暖之时较少。……为其如此,故人民常依地理之顺势,太阳出没,定其屋庐之方向。……里巷背阴向阳,亦犹门屋东开向日也。”[105]冯先生的意思是说,敬日崇东、门屋东开的习俗源于向阳取暖的生活需要,这可真是面壁虚构的奇谈!稍有一点北方生活经验的人都知道,屋室要向阳取暖只能是门窗朝南,朝东肯定是不行的。我现在的居室就是东西向(俗谓方向不正),冬天最需要阳光的时候却几乎整天都见不着太阳。所以,敬日崇东肯定和向阳取暖无关。既然这种习俗与实际生活需要无关,那就只好从精神生活方面去寻找原因。其实,冯家升先生已经发现突厥、回纥(回鹘)等古代民族也有敬日的习俗,惜因泥于陈说,以为“契丹贵日崇东,亦所固有,非必受突厥风俗之影响”[106],未能深究传播交流途径。我认为,契丹敬日习俗固未必受突厥影响,但完全可能受回鹘影响。因突厥汗国久亡,其“日火崇拜”为祆教习俗[107],重点在火不在日[108];而回鹘则以崇拜光明的摩尼教为国教,如前所述,按照摩尼教教义,人类灵魂得救的程序是:拯救之神先将人的灵魂运到月宫去锻炼,锻炼纯净的灵魂再转到日宫去,最后回归光明王国[109]。这应当就是契丹祭东、拜日乃至形成敬日崇东习俗的本意。

반대. 그렇다면 마니교가 유입되기 훨씬 전의 고구려나 북방유목민족의 태양숭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关于第二个问题,《辽史》明确记载契丹日月并祭的有两次,见《圣宗纪》一:统和元年十二月“戊申,千龄节,祭日月,礼毕,百僚称贺”;《圣宗纪》二:统和四年十一月“癸未,祭日月,为驸马都尉(萧)勤德祈福。”明确记载不拜月的只有一条史料,即《兵卫志》上“兵制”条:“凡举兵,帝率蕃汉文武臣僚,以青牛白马祭告天地、日神,惟不拜月,分命近臣告太祖以下诸陵及木叶山神,乃诏诸道征兵。”举兵为特例,本不可据之以偏概全,但《礼志》有拜日仪而无专门的拜月仪又引起了疑虑。《辽史·礼制·考证》在引述《兵制》的记载以后指出:“则拜日之仪,有独拜日者,有兼拜月者。拜月之仪,志虽未载,其仪当与拜日等。”[110]冯家升先生则认为:“《志》无拜月仪者,不为所贵也。日月敬拜轻重之分,甚属显然,何得谓拜月与拜日等乎?”[111]查《辽史》,契丹用日月兼名之事颇多,如太宗天赞五年“八月丁酉,以大圣皇帝、皇后宴寝之所号日月宫,因建日月碑”;会同元年六月“癸巳,诏建日月四时堂,图写古帝王事于两庑。”保大元年“金兵望日月旗,知天祚在其下”。可见,说契丹兼拜日月应该是不会错的。但冯先生所说“日月敬拜轻重之分”可能也是有的。按照摩尼教的说法,“月之所以有十五天不太明亮,就是因为人间的灵魂在那里受锻炼,其中不纯洁的黑暗分子显露出来造成的。等到灵魂都炼得纯净时,就转到日宫去,而月宫由于空净而恢复了光明。这样的情形,每月又有十五天。”[112]这大概就是契丹日月兼拜同祭却又“敬日常胜于敬月”的原因。
于是我就想,天赞三年(924)六月耶律阿保机当众预言自己的归宿,最后说:“日月非遥,戒严是速”[113];祖州“内城,殿曰两明,奉安祖考御容;曰二仪,以白金铸太祖像;曰黑龙,曰清秘,……太祖陵凿山为殿,曰明殿。……门曰黑龙”[114],这些很可能都和摩尼教信仰有关。敦煌出土《摩尼教残经一》:“惑游心城,当知是师乐说日月光明宫殿,神通变化,具足威力;次于法中,专说诚信”;《下部赞》:“对日月宫,二光明殿,各三慈父,元堪赞誉”[115]。按照摩尼教教义,在拯救灵魂(光明分子)的道路上,“日宫里住着第三使、生命母和净风,而明使耶稣、惠明使和初人(先意)则住在月宫。”[116]
契丹有君基太一神,《辽史·国语解》:“君基太一神,福神名。其神所临之国,君能建极,孚于上下,则治化升平,民享多福。”太祖九年(915),“是岁,君基太一神数见,诏图其像。”所谓“君能建极”,显然是修史文人的望文生义之说。那么这位君基太一究竟是何方神圣呢?我认为,还是来自回鹘摩尼教的神明。据研究,“救世主耶稣居于月宫,在突厥文书中,它实际等于月宫。日神和月神(回鹘语Kün-ai-t?ngri)是中亚摩尼教广为崇拜的拯救之神。”[117]君基太一显然就是回鹘语Kün-ai-t?ngri刻意文饰的一种音译,本意为日月天神。在回鹘汗国时期可汗的尊号里,经常可以见到嵌有这种名号[118]。这里顺便说说,后来的宋朝崇奉道教,有所谓十神太一,其中君基太一、臣基太一、民基太一名号[119],很让人怀疑就是由契丹君基太一神名望文生义敷衍而成。诚如是,这也可算作传统文化交流整合的一个典型案例吧。
本节最后想就契丹葬俗谈几句。《北史·契丹传》:“父母死而悲哭者,以为不壮。但以其尸置于山树之上,经三年后,乃收其骨而焚之。”可见契丹人早期的丧葬制度,是一种天葬加火葬的形式[120]。然而《新唐书·北狄契丹传》却说:“风俗与突厥大抵略侔。死不墓,以马车载尸入山,置于树颠。子孙死,父母旦夕哭;父母死则否,亦无丧期。”显然,唐代的契丹受突厥日火崇拜的影响,一度摒弃了火葬习俗。可是,同是《新唐书》作者的欧阳修又在《新五代史·四夷契丹附录》里说:“父母死,以不哭为勇,载其尸深山,置大木上,后三岁往取其骨焚之”,乍看与《北史·契丹传》全同,但与《唐书》记载比较可知,五代时契丹葬俗不再受突厥影响,且在相当的层面上实行火葬[121]。契丹贵族火葬少见,但有两点值得注意:一是多用尸床、尸台而很少用棺[122],这很可能是一种裸葬的遗俗;二是早期很少以生前用品入葬,如祖州内城诸殿“各有太祖微时兵仗器物及服御皮毳之类,存之以示后嗣,使勿忘本”[123];“丧葬仪:圣宗崩,……太巫祈禳。皇族、外戚、大臣、诸京官以次致祭。乃以衣、弓矢、鞍勒、图画、马驼、仪卫等物皆燔之。至山陵,葬毕,上哀册。”[124]我怀疑这些可能都曾受到摩尼教的影响。陈垣先生曾引敦煌出土摩尼教经残卷说:“其残存第一行云:‘宿死尸,若有覆藏,还同破戒。’可知裸尸以葬,是摩尼法。”又引“廖刚《高峰文集》卷二《乞禁妖教札子》云:‘……(吃菜事魔)死则人执柴烧变,不用棺椁衣衾,无复丧葬祭祀之事。……’右所论未明指摩尼教,然云一切务减人道,唯摩尼教似之。”[125]
不过,契丹建国前自有本族习俗,圣宗后又盛行佛教,丧葬形式颇为复杂多样。有学者指出:契丹丧葬制度“如果与辽王朝建立之前相比较,其间有着明显的间断现象。这一情况,是否意味着唐代后期,契丹族的社会情况曾有过一个较短期的大变化,而史传失于记载呢?即使文献失载,为什么在考古发现中,也难为这种变化作证呢?”[126]或许,其原因就在于当时契丹改宗摩尼,风行裸葬、薄葬加火葬的缘故。究竟如何,当有待更多更为细致深入的研究工作。

四、关于述律氏

毋庸讳言,耶律阿保机的回鹘皇后述律氏是协助促成他即位称帝的重要人物,也是参与契丹建国的回鹘族的代表人物。据研究,契丹建国以前其部族一直实行部落对偶婚制[127]。迭剌部的耶律氏直到阿保机以前从未与回鹘人结成婚姻[128],阿保机突破氏族社会传统改娶回鹘人为妻[129],在传统社会强烈的政治婚姻背景之下,可以肯定此举有利用回鹘部族强大社会力量的企图[130]。关于回鹘人在契丹社会、政治生活中的重要作用,前人已有系统研究,本文这里只拟从文化的角度对述律氏的作用做些探讨。
《辽史·太祖淳钦皇后传》:“述律氏,讳平,小字月里朵,其先回鹘人糯思”。查《后妃传》,留有名讳的除了这位后来尊号为应天皇太后的述律氏,就只有那位著名的与宋朝订立了澶渊之盟的承天萧太后。所以我认为,这种名讳都是特例,很可能都是史臣文饰所加的汉化名称,就如耶律阿保机之讳亿[131]。述律氏小字月里朵,我推测就是回鹘语?rt的音译[132],意为火焰、光辉或光芒[133],不难看出,这一名称具有很强的摩尼教光明崇拜色彩。在吐鲁番高昌故城发现的摩尼教经书插图中,有一幅断代为八世纪末的“摩尼教女神和女选民”画,据研究者克林凯特说:“这位摩尼教救世主由两个女选民陪伴,是位女性,只可能是惠明使。她立于一个华丽、伸开的莲花宝座之上。其右手所捧的一件东西,也许可解释为莲花、还愿塔、圣骨盒,甚至也可能像勒柯克所说的,是个香炉”;“女神后边的两个女选民站在一个大莲花座上,就如我们在佛教图画上所看到的。女选民与光明女神之间乃有一种特殊的关系,这跃然可见。该女神也许就是光明的圣玛丽亚。”[134]惠明使是摩尼教的一位拯救女神,据其教义,她和耶稣、初人(先意)一起住在灵魂拯救的第一站——月宫里[135]。在摩尼教里,耶稣、惠明使和大智甲构成了常被祈祷的三位一体,但耶稣只是主神第三使的一个分身。如前所述,大智甲即瓦孟(Vahman)既是灵魂的引导者,又可喻指得到拯救的国王,因之可藉以神化耶律阿保机,那么,与之同时阿保机的配偶述律氏也就被神化成了惠明使。这一神话的妙处在于它既可以解说祭山仪中天神、地祇一神二相的问题,也可以解说始祖传说中奇首可汗与可敦异性配偶的问题,还可以藉之提高和加强阿保机的回鹘皇后述律氏在契丹国家政治生活中的地位。我想,这应该才是童谣“青牛妪,曾避路”的本意。如摩尼教《下部赞·叹无上明尊偈文》所言:“堪誉惠明是法王,能收我等离死错。照耀内外无不晓,令我等类同诸圣。”[136]于是,阿保机当上天皇帝,述律氏就成了地皇后;阿保机“上尊号曰大圣大明天皇帝,后曰应天大明地皇后。大赦,建元神册。”[137]
还有一件事也涉及到述律氏,即所谓“扶余之变”——阿保机之死。阿保机之死的最大问题在于,据《辽史·太祖纪》记载,他本人在死前三年就已公开预言了自己的死期,而且恰恰正是三年以后所谓“扶余之变”他神秘死亡的日期,这就不能不令人感到蹊跷。由于预言是公开宣布的,因而也不排除阿保机本人导演这出戏的可能,但无论编导这出戏的人是谁,这场演出幕后的文化原因值得深究。让我们先看看阿保机的预言:

(天赞三年,924)六月乙酉,召皇后、皇太子、大元帅及二宰相、诸部头等诏曰;“上天降监,惠及烝民。圣主明王,万载一遇。朕既上承天命,下统群生,每有征行,皆奉天意。是以机谋在己,取舍如神,国令既行,人情大附。舛讹归正,遐迩无愆。可谓大含溟海,安纳泰山矣!自我国之经营,为群方之父母。宪章斯在,胤嗣何忧?升降有期,去来在我。良筹圣会,自有契于天人;众国群王,岂可化其凡骨?三年之后,岁在丙戌,时值初秋,必有归处。然未终两事,岂负亲诚?日月非遥,戒严是速。”闻诏者皆惊惧,莫识其意。[138]

看得出来,这篇预言已经得到了史官文人的修饰,“宪章斯在,胤嗣何忧”完全是遗嘱用语,游离于全篇预言口气之外。无论如何,阿保机大义凛然、视死如归的宣言,还是让凡夫俗子感到惊惧,这种气概恐非宗教献身精神莫属。现在看来,“上天降监,惠及烝民。圣主明王,万载一遇。朕既上承天命,下统群生,每有征行,皆奉天意。是以机谋在己,取舍如神”,“升降有期,去来在我。良筹圣会,自有契于天人;众国群王,岂可化其凡骨”,“日月非遥,戒严是速”,这些都可以在摩尼教的灵魂拯救教义中找到依据(见前)。可以说,摩尼教就是阿保机的精神支柱。问题在于,谁是他的遗嘱执行人呢?答案只能是述律氏。真是:生彼之道,灭彼之门,一饮一啄,莫非前定。
据《辽史》记载,天显元年(926)秋七月,耶律阿保机灭渤海班师途中,“甲戌,次扶余府,上不豫。是夕,大星陨于幄前。辛巳平旦,子城上见黄龙缭绕,可长一里,光耀夺目,入于行宫。有紫黑气蔽天,踰日乃散。是日,上崩,年五十五。天赞三年上所谓‘丙戌秋初,必有归处’,至是乃验。壬午,皇后称制,权决军国事。”[139]关于这一事件的政治意义,陈述(玉书)先生已有研究[140],本文这里只做点文化分析。阿保机去世前,后唐使者姚坤适至行在,《旧五代史》记载:“坤至止三日,阿保机病伤寒。一夕,大星殒于其帐前,俄而卒于扶余城,时天成元年七月二十七日也。其妻述律氏自率众护其丧归西楼,坤亦从行,得报而还。”[141]两相比较可以看出,《辽史》的记载显然是有意回应阿保机的归宿预言。此时阿保机已经魂归天国,能做这种回应的只能是述律氏或她所授意之人。大星自然是天曜之一,据摩尼教教义,天曜众星是由部分受到黑暗污染的光明分子做成的[142],这适好用来喻指得到拯救的国王。“大星陨于幄前”就等于发布摩尼教的讣告。“子城上见黄龙缭绕,可长一里,光耀夺目,入于行宫”,这是用了摩尼教里关于 “光耀柱”的神话。据其教义,在第三宇宙阶段的拯救之神是第三使、惠明使、光耀柱和大智甲,主尊第三使住在日宫,惠明使住在月宫,大智甲是灵魂的引导和审判之神[143];“纯洁得救的灵魂凝聚成光耀柱(Column of Glory),这就是我们天上所见的银河。在摩尼的教义中,它既是神,又是灵魂到达月宫、日宫以至最后回归光明王国的道路。”[144]所以我们看到,阿保机死后最初的谥号为升天皇帝,“太祖所崩行宫在扶余城西南两河之间,后建升天殿于此,而以扶余为黄龙府云。”[145]至于“有紫黑气蔽天,踰日乃散”,自是喻指灵魂得救升天后遗弃的黑暗物质无疑[146]。当然,这些神话都是为了宣传之用,到底是想附会或掩饰怎样的实际情况,现有史料没有提供证据[147],我们就不得而知了。
《辽史·太祖淳钦皇后传》:“太祖崩,后称制,摄军国事。及葬,欲以身殉,亲戚百官力谏,因断右腕纳于柩。太宗即位,尊为皇太后。”《地理志》一“上京道临潢府”条:“太祖崩,应天皇后于义节寺断腕,置太祖陵。即寺建断腕楼,树碑焉。”关于述律断腕,《新五代史·四夷附录》二有较详细的记载:

述律为人多智而忍。阿保机死,悉召从行大将等妻,谓曰:“我今为寡妇矣,汝等岂宜有夫。”乃杀其大将百余人,曰:“可往从先帝。”左右有过者,多送木叶山,杀于阿保机墓隧中,曰:“为我见先帝于地下。”大将赵思温,本中国人也,以材勇为阿保机所宠,述律后以事怒之,使送木叶山,思温辞不肯行。述律曰:“尔,先帝亲信,安得不往见之?”思温对曰:“亲莫如后,后何不行?”述律曰:“我本欲从先帝于地下,以子幼,国中多故,未能也。然可断吾一臂以送之。”左右切谏之,乃断其一腕,而释思温不杀。

看来述律断腕确有其事。陈述(玉书)先生认为:“赵思温抗辩不从,述律反断己腕而释思温,亦为情理所不许,仍当别求解说。”[148]我以为,摩尼教神话或可为此作解。据其教义,各种摩尼教的神都是大明尊的分身,属于大明尊的一个部分,但又和大明尊有区别,他们的职能彼此也不相同[149];如前所述,耶稣、惠明使(女身=述律后)和大智甲(得救之王=阿保机)三位一体(即互为肢体)[150],断腕之举适可证成此说,阿保机尽可升天,述律氏神威不减;赵思温汉人,不知者不为罪,故可释而不杀,益增其事之神秘,人之神圣。
还有一些契丹习俗和传说也可以在摩尼教范围内得到解说,如所谓契丹初兴之主有所谓“喎呵”[151]者,很有可能就是摩尼教中的嗢末(Hormizd)神。但既然乾隆皇帝以之为“神道设教”的说法能够被学界接受[152],当然也不影响我们立论,所以就不在此深究细论了。

结 语

本文检讨了辽太祖耶律阿保机的降生神话、始祖神话以及一些重要的契丹习俗,发现它们大都能在摩尼降生神话及摩尼教教义和神话中找到原型或依据。我认为,在以摩尼教为国教的回鹘汗国崩溃,大批回鹘族人进入契丹社会并发挥重要作用的历史背景下,很难把这些神话传说的相符对应完全归之于偶然的巧合。
六十八年前,王日蔚先生在其《契丹与回鹘关系考》最后说:“至二者在文化之相互影响,则以材料缺乏,未能得其真相。……他日有材料时,当专篇论之也。”[153]更早,八十年前,陈垣先生作《摩尼教入中国考》,特别于第十四章《南宋摩尼复盛》后标出:“同时北朝辽、金、夏关于摩尼之史料,当亦不少,因摩尼固尝盛行北地。此节且待他时之发现。”[154]本文之作,或可稍平前辈之憾。不过,限于材料和学力,本人所探讨者只是不同宗教文化影响的蛛丝马迹,且经与旧有习俗的整合[155],并非是系统宗教的传播。如前辈学者冯承均先生所言:“间尝研究我国制度,分析其间固有及外来之成分,往往与类似固有制度之中,发现外国输入之事,特因习用已久,遂致主客不分”[156],本文所论,泰半仿此。本人以为,这种研究既有学术价值,也能提供现实借鉴意义。
九世纪中回鹘汗国崩溃给契丹传统社会带来了新的激励因素。回鹘族人进入契丹社会,给契丹部族注入了新鲜血液;回鹘所奉摩尼教的传入,则为契丹传统社会的飞跃与变革提供了新的精神武器。耶律阿保机即以结亲取得回鹘族人(很可能把持着商业)的支持,并藉其摩尼教神话自己,从而得以突破传统,实现革命,建立国家,实行帝制,成为契丹人的民族英雄。
宗教及文化交流往往与商业活动同时进行[157]。唐代后期,回鹘人(包括在回鹘汗国配为部落的粟特人即昭武九姓胡)实际上已经大量从事商业经营活动[158]。汗国崩溃以后,回鹘人并没有马上融入变成游牧的契丹人,他们在相当一段时期还作为不同的群体存在并有自己独特的文化。因此,回鹘商业文化对契丹社会发生飞跃变革的影响也值得专门研究。传统的说法认为契丹是农牧二元社会,然而,二元之间有赖商业联系,因而很可能是农、牧、商三元社会,即相当一段时期的汉人及渤海农业、契丹牧业、回鹘商业[159]三足鼎立。诚如是,基于“二元社会”说的一些理论如“征服王朝论”等就有必要重新探讨。

2003-9-6完成于北大畅春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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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参王锺翰主编《中国民族史》,中国社会科学出版社,1994年,432页。
[2] [北齐]魏收撰《魏书》卷100《契丹传》,中华书局标点本(以下引正史均为此本),1984年,2223页。
[3]同上引《魏书》卷100,2222页。
[4] [元]脱脱等撰《辽史》卷1《太祖纪》上,10页。
[5]如陈述(玉书)《契丹社会经济史稿》,三联书店,1978年;同作者《契丹政治史稿》,人民出版社,1986年;蔡美彪《契丹的部落组织和国家的产生》,载《历史研究》1964年第5-6期;[日]松井等著《契丹勃兴史》,刘凤翥译、邢复礼校汉译本收在《民族史译文集》第10辑,中国社会科学院民族研究所, 1981年。
[6]近年国内有关契丹及辽朝历史的论著已经不少,比如,可以参考张正明《契丹史略》,中华书局,1979年;舒焚《辽史稿》,湖北人民出版社,1984年;杨若薇《契丹王朝政治军事制度研究》,中国社会科学出版社,1991年。
[7]参上引[日]松井等《契丹勃兴史》,2、27页。
[8]参王日蔚《契丹与回鹘关系考》,载《禹贡》卷4第8期(1935年12月);李符桐《回鹘与辽朝建国之关系》,台北文风出版社,1968年,后收入李符桐论著全集编委会编《李符桐论著全集》第二册,台湾学生书局印行,1992年,263-405页;王民信《契丹外戚集团的形成》,收在氏著《契丹史论丛》,台北学海出版社,1973年,73-87页。
[9]关于崇拜光明是摩尼教的主要特征和回鹘奉摩尼的情况,参林悟殊《摩尼教入华年代质疑》及《回鹘奉摩尼教的社会历史根源》,前文收在氏著《摩尼教及其东渐》,中华书局,1987年,58页,后文收在同书87-99页。
[10]见[宋] 欧阳修、宋祁撰《新唐书》卷219《北狄契丹传》,6173页;[宋]薛居正等撰《旧五代史》卷137《外国传》一,1827-8页;[宋]欧阳修撰《新五代史》卷72《四夷附录》一,886-7页;[宋]司马光编著、[元]胡三省音注《资治通鉴》(以下简称《通鉴》)卷266,后梁太祖开平元年(907)五月“契丹遣其臣袍笏梅老来通好”条,中华书局标点本(本文引《通鉴》均为此本),1982年,8676-9页。
[11]见《辽史》卷1《太祖纪》上,2-3页;同书卷73《耶律曷鲁传》,1220-1页。
[12]参杨志玖《阿保机即位考辨》,载《史语所集刊》17期,1948年4月。
[13]见上引林悟殊《摩尼教及其东渐》附录《〈摩尼光佛教法仪略〉释文》,230-1页。
[14] [德]克林凯特著、林悟殊译《古代摩尼教艺术》,中山大学出版社,1982年,22页。
[15]同上引《古代摩尼教艺术》,24页。
[16]本文这里用的是摩尼教所谓“五明子”即清静气、妙风、明力、妙水、妙火的名称,见前引《摩尼教及其东渐》15页。克林凯特在《古代摩尼教艺术》中说:“许多文书也言明尊为五大神,即五种明亮的宇宙分子——气、风、明、水、火所环绕。这五种分子和人类学的五个范畴,即推理、意志、智力、思想、理解等五个概念相联系。”(32页)显然,这五种明亮分子属于摩尼教崇拜的基本对象,故其名称大同小异,并无本质的区别。
[17]见前引《摩尼教及其东渐》附录《〈下部赞〉释文》,256页。
[18]见《摩尼教及其东渐》附录《〈下部赞〉释文》,256、258页。
[19]《古代摩尼教艺术》,97页。据克林凯特的说法,在吐鲁番高昌故城发现的七、八世纪摩尼教经书插图中,有一幅是在“建筑物的拱门上,画着三位一体的神,……其主神位于中央,较其他神为大。而且,主神的王冠上还另有一装饰,看来是一个带着同样王冠的较小人头。若如是,则暗示了拯救之神的分身理论。随伴的两个较小神像,其保存得最完好的一个也带着一顶与主神类似的王冠,但没有主神那一附加的装饰。我们可以推测,这里画的是摩尼教的拯救之神,也许就是第三宇宙阶段所创造的那批神。”(《古代摩尼教艺术》,88页。)而据摩尼教教义,大明尊在第三宇宙阶段唤出的拯救之神有第三使、惠明使、光耀柱(银河)以及大智甲(Great Nons),参前引《古代摩尼教艺术》35页。
[20]参上引《古代摩尼教艺术》,35-6、91-2页。
[21]参上引《古代摩尼教艺术》,97-8页。
[22]参上引《古代摩尼教艺术》,41、78-9、92页。
[23]《古代摩尼教艺术》,78-9页。
[24]《古代摩尼教艺术》,42页。
[25]《古代摩尼教艺术》,79页。
[26]克林凯特认为:“此处画的可能是762年信奉‘明教’的牟羽可汗,要不就是像牟羽可汗那样,与臣属一道奉摩尼教的另一位国王。”(《古代摩尼教艺术》,78页)
[27]见《摩尼教及其东渐》附录《〈下部赞〉释文》,254页。
[28]这类字眼在摩尼教经典里屡见不鲜,可参上引《摩尼教及其东渐》附录。
[29]《辽史》卷1《太祖纪》上,10页。
[30]《辽史》卷112《逆臣传》上,1498页。
[31]《辽史》卷2《太祖纪》下,19页。耶律阿保机的这篇预言充满神秘的谶语,尤其是预言了自己的死期,而且恰恰正是三年以后所谓“扶余之变”他神秘死亡的日期,这太令人疑惑了!总之,我感到,这篇预言的内容,它的产生,所谓“扶余之变”,甚至契丹灭渤海,都还有深藏未露的因素有待揭示,尤其是像契丹这样处于变革期的传统社会,异质文化的作用值得进一步研究。
[32]《辽史》卷2《太祖纪》下,23-4页。参刘凤翥《辽太祖尊号谥号考辨》,载《社会科学辑刊》1979年1期,收入孙进己等编《契丹史论著汇编》(上),235-6页。
[33]见前引《摩尼教及其东渐》附录,250-1页。
[34]见《摩尼教及其东渐》附录,253、254、257-8页。
[35]见《辽史》卷1《太祖纪》上,3页。
[36]见陈述《契丹政治史稿》,68页。
[37]见《辽史》卷1《太祖纪》上,10页。关于中国历史上开皇、始皇、皇始一类名号的意义,请参《通鉴》卷7,秦始皇二十六年(前221),“王初并天下”条, 234-5页;同书卷108,晋孝武帝太元二十一年(396),“魏群臣劝魏王珪称尊号”条胡注,3429页。有关研究参田余庆《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的形成和演变》,载《国学研究》第5卷,北京大学出版社,1998年,389页及402-3页注81。
[38]例如早在契丹之前,高句丽就有始祖之母感日而孕的传说,参《魏书》卷100《高句丽传》,2213页。
[39]参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收在《漆侠先生纪念文集》,河北大学出版社,2002年10月,157、160、164-5页。这里我要感谢刘先生惠赠大作,该文资料丰富,令我受益匪浅。
[40]见王民信《契丹古八部与大贺遥辇迭剌的关系》,收在前引《契丹史论丛》,47页。
[41]参杨富学《契丹族源传说借自回鹘论》,收入氏著《中国北方民族历史文化论稿》,甘肃人民出版社,2001年,144-55页。
[42]见《辽史》卷1《太祖纪》上,8页。
[43]参上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0页。
[44]见《辽史》卷2《太祖纪》下,24页。
[45]《辽史》卷116《国语解》,1545页。
[46]据说有人认为,“木叶山的地理位置之所以众说纷纭,主要是因为一千多年来地貌的演变”,“至少在辽代前期,潢河和土河还属于黑龙江水系而不是辽河水系,辽代的潢河即今乌力吉木伦河,潢河与土河在阿鲁克尔沁旗东南交会后,东北注入松花江”(见前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5页转述)。这就是说,今天的松辽分水岭(吉林省长春—长岭—通榆一线)只是辽代后期以来一千来年地貌演变的结果,这不惟难以置信,简直是信口开河!
[47]参前引陈述《契丹社会经济史稿》附录《阿保机营建四楼说证误》,191-206页。
[48]前者见于八世纪的突厥文碑铭,参特勤《鄂尔浑突厥语语法》(T. Tekin, A Grammar of Orkhon Turkic)第四章《词汇表》,布鲁明顿:印第安纳大学出版,1968年,330、369页;后者见于十一世纪辞书,参马合木·喀什噶里《突厥语词汇》(Mahmud al-Kashqari, Compendium of the Turkic Dialects)第三册(索引),哈佛大学出版社,1985年,21、169页。
[49]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北京大学出版社,1995年,243-4、247页。
[50]见前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71页。
[51]《新五代史》卷72,885-6页。
[52]参郭锡良《汉字古音手册》,北京大学出版社,1986年,26、36、83、107页。
[53]见贾敬颜遗著《东北古代民族古代地理丛考》,中国社会科学出版社、新西兰霍兰德出版有限公司,1994年,13页。
[54]见该书《例言》4-5页。
[55]参王力《同源字典》,商务印书馆,1982年,79-80页。
[56]如《刘郁〈西使记〉》,见王国维《古行记四种》叶八,收入《王国维遗书》第13册,上海古籍书店影印本。并请参谭其骧主编《中国历史地图集》第7册,中华地图学社,36-7页。
[57]参贾敬颜、朱风合辑《蒙古译语、女真译语汇编》,天津古籍出版社,1990年,2页。
[58]贾敬颜认为:“说契丹人讲的话是一种古蒙古语,一种颚音很重的古蒙古语,应该是令人信服的”,见氏撰《契丹文》,收在《中国民族古文字》,北京:中国民族古文字研究会,1982年,106-7页。
[59]见道布编著《蒙古语简志》,民族出版社,1983年,22页。
[60]参前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4页。
[61]参《辽史》卷49《礼志》一,834-5页。
[62]《辽史·礼志》序:“今国史院有金陈大任《辽礼仪志》,皆其国俗之故,又有《辽朝杂礼》,汉仪为多。别得宣文阁所藏耶律俨《志》,视大任为加详。存其略,著于篇。”(834页)可见元修《辽史》,曾对契丹国俗和汉仪作了勘比整合。然而还不止此,同书《礼志》五《嘉仪》上“皇帝受册仪”后注:“又有《上契丹册仪》,以阻午可汗柴册礼合唐礼杂就之。”(859页)可见礼俗勘比整合在辽代当时已经开始。
[63] [唐]房玄龄等撰《晋书》卷107《石季龙载记》下:“龙骧孙伏都、刘铢等结羯士三千伏于胡天,亦欲诛(冉)闵等。”(2791页)《通鉴》卷98,晋穆帝永和五年(349)“赵主鉴使乐平王苞”条记此事,胡注云:“胡天盖石氏禁中署舍之名。”(3099页)并请参唐长孺《魏晋杂胡考》,收在氏著《魏晋南北朝史论丛》,三联书店,1978年,416-7页。
[64]参前引贾敬颜《契丹文》,99页。
[65]《辽史》卷49《礼志》一,834页。
[66]同前引林悟殊《摩尼教及其东渐》,14页。并请参《古代摩尼教艺术》,71-2页。契丹“再生仪”仪注有:“在再生室东南,倒植三岐木。”(《辽史》卷53 《礼志》六,879页)此三岐木或许就是摩尼教象征光明王国的三干树,再生与往生方向不同,故其倒植。我国的契丹考古发现过不少壁画,应该有希望把这种三干树识别出来。
[67]见《摩尼教及其东渐》,255、256页。
[68]契丹族并非只有八部,详参上引杨志玖《阿保机即位考辨》。因此,八部的说法只具传说的象征意义而难以做认真的历史考实。或者,这只是受鲜卑八部大人制度影响而产生的比附说法也未可知。有关的史料见《辽史》卷32《营卫志》中《部族》上,376-81页;最近的有关信息可参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0-62页。
[69]见罗炳良主编《中华野史》辽夏金元卷,泰山出版社,2000年,10页。
[70]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4页。
[71]参《辽史》卷49《礼志》一,836页。
[72]参前引王民信《契丹古八部与大贺遥辇迭剌的关系》,收在前引《契丹史论丛》,45页。
[73]冯家升对此有详细统计,参氏撰《契丹祀天之俗与其宗教神话风俗之关系》,收在《冯家升论著辑粹》,中华书局,1987年,51-7页。
[74]见前引王民信《契丹古八部与大贺遥辇迭剌的关系》,收在前引《契丹史论丛》,46页。
[75]参冯家升《契丹祀天之俗与其宗教神话风俗之关系》,同上引《冯家升论著辑粹》,68-9页。又,唐太宗初即位,与颉利可汗于便桥杀白马盟誓(两《唐书·突厥传》);苏定方伐百济,于江边杀白马祭祀(《(新增)东国舆地胜览》卷十八,忠清右道公州镇扶余县古迹)。[俄]E·N·杰烈维扬科《黑龙江沿岸的部落》也曾提到古代民族中的一些例子:“由于契丹人企图强占阿骨打亡兄的贈马,几乎引起了一场冲突。死去的撒改也曾以白色御马陪葬。假如我们还记得中国人和那乃人均以白色志丧、通古斯人皆以白马祭献林神的话,那么。上述最后这—情节则具有特殊的重要意义。……直到不久以前,在朝鲜还保留着这样一种习惯,送葬时在灵架上放有白马像。这是一种避邪符。在一些为开业举行的仪式中,马也是中心角色。马,特别是白马,也是一种祭祀用的动物[注239:U.V.约诺娃:《朝鲜人宗教仪式中的图腾崇拜残余》,155页]。”(林树山、姚凤译,吉林文史出版社, 1987 年,294页)
[76]见前引《冯家升论著辑粹》,63页。
[77]本段所转述摩尼教内容请参前引《古代摩尼教艺术》,36-7、43-4页;《摩尼教及其东渐》,17-8页。
[78]《辽史》卷52《礼志》五,859页。
[79]参《新唐书》卷12《礼乐志》二,323页;同书卷14《礼乐志》四,352页;同书卷21《礼乐志》十一,464页。
[80]见王民信《契丹的柴册仪与再生仪》,同前引《契丹史论丛》,95页。
[81]《辽史》卷49《礼志》一,838页。
[82]参陈述《契丹政治史稿》,45页。
[83]参前引[俄]杰烈维扬科《黑龙江沿岸的部落》,146页。
[84]《辽史》卷49《礼志》一,838页。
[85]《摩尼教及其东渐》,243、256-7页。
[86]《摩尼教及其东渐》,56页。
[87]参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0页。
[88]《辽史》卷18《兴宗纪》一,220页。
[89]《辽史》卷28《天祚皇帝纪》二,332页。
[90]《辽史》卷37《地理志》一,442页。
[91]《辽史》卷37《地理志》一,446页。
[92]摩尼教的信徒叫听众,僧侣叫选民,二者宗教地位不相等,参《古代摩尼教艺术》43-4页。
[93]参前引《古代摩尼教艺术》,56、70、86、93、94-5页。
[94]《辽史》卷53《礼志》六,879页。
[95]参[日]鸟居龙藏《契丹黑山黑岭考》,载《燕京学报》第28期(1930年12月),收入孙进己等编《契丹史论著汇编》(下),1101-5页。
[96]参[苏]穆尔札也夫著、郁浩译《中亚细亚(自然地理概要)》,商务印书馆,1959年,49页表3。
[97]参《伊斯兰百科全书》(Encyclopaedia of Islam, New Edition)第3卷,莱顿:E.J.Brill,1971年,1113页。
[98]参刘凤翥《“阿穆尔”源于契丹语的“黑水”说》,载《黑龙江文物丛刊》1984年1期,收入孙进己等编《契丹史论著汇编》(下),744页。
[99]参上引鸟居龙藏《契丹黑山黑岭考》,1113页。
[100]同前引林悟殊《摩尼教及其东渐》,14页。并请参《古代摩尼教艺术》,71-2页。契丹“再生仪”仪注有:“在再生室东南,倒植三岐木。”(《辽史》卷53 《礼志》六,879页)此三岐木或许就是摩尼教象征光明王国的三干树,再生与往生方向不同,故其倒植。我国的契丹考古发现过不少壁画,应该有希望把这种三干树识别出来。
[101]《古代摩尼教艺术》,32页,并请参同书71页引摩尼教《大力士经》。
[102]参前引《古代摩尼教艺术》,38、41-2、44页;《摩尼教及其东渐》,18页。按照传统的波斯宗教即祆教的观念,北方为群魔所居(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26页),摩尼教与此相反,或因为异端的缘故。但印度宗教也认为香巴拉Shambhala即理想天国在北方(见《格西曲札藏文词典(附汉文注释)》,民族出版社,1990年,877页),这很可能反映了早期印度伊朗民族由中亚迁徙分离时形成的文化分歧(参前引拙著243页)。据说西方语言的香格里拉Shangrila即源于香巴拉一语的梵文。藏传佛教也引入了这一传说。无论如何,该传说的基本要义是指信奉者的北方而不是其他任何地方,这一点应该是研究者十分留意的。
[103]《辽史》卷49《礼志》一,836页。
[104]参前引冯家升《太阳契丹考释》,收在《冯家升论著辑粹》,中华书局,1987年,39-49页。
[105]见上引冯家升《太阳契丹考释》,44-5页。
[106]参前引冯家升《太阳契丹考释》,47-8页。
[107]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附录壹、贰,224-56页。
[108]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231页。
[109]参前引《古代摩尼教艺术》,38、41-2、44页;《摩尼教及其东渐》,18页。
[110]转引自冯家升《太阳契丹考释》,41页。
[111]冯家升《太阳契丹考释》,42页。
[112]《摩尼教及其东渐》,18页。
[113]《辽史》卷2《太祖纪》下,19页。
[114]《辽史》卷37《地理志》一“上京道祖州”条,442页。明殿为阿保机陵寝专名,有关研究参陈述《契丹政治史稿》,45-6页。
[115]《摩尼教及其东渐》,221、263页。
[116]《古代摩尼教艺术》35页,并请参考同书75页。
[117]《古代摩尼教艺术》,74页。
[118]参《古代摩尼教艺术》,82、96页。
[119]参《宋史》卷103《礼志》六,2508-9页。
[120]参贾洲杰《契丹丧葬制度研究》,载《内蒙古大学学报》1978年2期,收入孙进己等编《契丹史论著汇编》(下),589页。
[121]参贾洲杰《契丹丧葬制度研究》,592-3页。也有认为契丹火葬的原因是盛行佛教,但据研究那恐怕主要应是辽圣宗(982-1031)以后的事,参前引冯家升《契丹祀天之俗与其宗教神话风俗之关系》,58-62页。
[122]参贾洲杰《契丹丧葬制度研究》,591-2页。
[123]《辽史》卷37《地理志》一,“上京道祖州”条,442页。
[124]《辽史》卷50《礼志》二,“凶仪”条,839页。
[125]陈垣《摩尼教入中国考》,收入氏撰《陈垣学术论文集》第一集,中华书局,1980年,359、372页。
[126]贾洲杰《契丹丧葬制度研究》,592页。
[127]参前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0-62页。
[128]《辽史》卷32《营卫志》中《部族》上:“涅里相阻午可汗,分三耶律为七,二审密为五,并前八部为二十部。三耶律:一曰大贺,二曰遥辇,三曰世里,即皇族也。二审密:一曰乙室已,二曰拔里,即国舅也。”可见无论契丹分部如何,迄遥辇部落联盟时期,耶律氏都未与回鹘述律氏结成婚姻。有关研究可参金毓黻《辽部族考》,转见于前引王民信《契丹外戚集团的形成》,74-5页。
[129]或许正是此举引发了契丹部落的重新组合,从而促使契丹婚姻由部落外婚转为部落内婚、氏族外婚。这个问题值得另作研究,已有的讨论可参前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0-62页。
[130]回鹘人在契丹社会政治生活中所居重要地位由《辽史》的下述记载即可见一斑:太祖“四年秋七月戊子朔,以(述律)后兄萧敌鲁为北府宰相,后族为相自此始”(4页);“拜敌鲁北府宰相,世其官。”(1223页)
[131]参《新五代史》卷72《契丹附录》,890页。
[132]有关语音勘同可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附录壹,225-6页。
[133]参前引特勤《鄂尔浑突厥语语法》(T. Tekin, A Grammar of Orkhon Turkic)第四章《词汇表》,364页。
[134]《古代摩尼教艺术》,98页。
[135]参《古代摩尼教艺术》,35、96-7页。
[136]《摩尼教及其东渐》,251页。
[137]《辽史》卷1《太祖纪》上,3、10页。
[138]《辽史》卷2《太祖纪》下,19页。
[139]《辽史》卷2《太祖纪》下,23页。
[140]参前引《契丹政治史稿》,69-71页。
[141]《旧五代史》卷137《外国传》一,1832页。
[142]参《古代摩尼教艺术》,34页;《摩尼教及其东渐》,16页。
[143]参《古代摩尼教艺术》,35、41、78-9页。
[144]《摩尼教及其东渐》,18页。
[145]《辽史》卷2《太祖纪》下,23-4页。
[146]参《古代摩尼教艺术》,37页;《摩尼教及其东渐》,19页。
[147]参《辽史》卷2《太祖纪》赞,24页;陈述(玉书)《契丹政治史稿》,70-71页。
[148]《契丹政治史稿》,70页。
[149]参《古代摩尼教艺术》,33页。
[150]参《古代摩尼教艺术》,88、97页。
[151]参陈述《契丹政治史稿》,47页;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6-7页。
[152]参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6页。
[153]王日蔚《契丹与回鹘关系考》,载《禹贡》卷4第8期(1935年12月)
[154]陈垣《摩尼教入中国考》,366页。
[155]参《古代摩尼教艺术》,29、47-9、79等页;《摩尼教及其东渐》,26页。
[156]冯承均《伯希和、沙畹撰〈摩尼教流行中国考〉译序》,氏译《西域南海史地考证译丛八编》,中华书局,1958年,43页。
[157]参季羡林《商人与佛教》,收在中国史学会编《第十六届国际历史科学大会中国学者论文集》,中华书局,1985年,91-207页;并请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250-52页。
[158]参《旧唐书》卷195《回纥传》,5207页以下;《新唐书》卷217上《回鹘传》上,6120页以下;陈寅恪《元白诗笺证稿》第五章《新乐府·阴山道》,上海古籍出版社,1982年,254-60页。
[159]参《摩尼教及其东渐》,91、93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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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京大学中国古代史研究中

李大龙《汉唐藩属体制研究》中国社会科学出版社 2006年
程尼娜 古代中国藩属体制的探索-读《汉唐藩属体制研究》 史学集刊2008年5月 第3期

 
武帝以前 :藩臣(闽越、东瓯类型的民族或民族政权)- 外臣(南越,朝鲜等政权)- 敌国(匈奴政权)

武帝后 : 郡县(对前期某些藩臣和外臣实行郡县统治的地区)- 属国(设置属国都尉的地区)- 特设机构(设置诸护某校尉,西域都护府地区)- 外臣(又作外围藩属,西汉匈奴、东汉南匈奴地区)

唐代 : 藩臣(初隶属边州都督府,后为羁縻府州) - 舅甥(吐蕃)- 敌国(唐初突厥)

藩属体制作为保护王朝核心地区(中原地区)的安全而出现的一个特殊的统治体制,它的发展、变化的根本原因在于中央王朝国力的强与弱。


程尼娜之想
敌国纳入藩属体制
郡县改为初郡
唐代划为 : 羁縻府州 - 藩臣- 舅甥 - 敌国



원본책을 좀 구해서 읽어보는게 좋을듯하다. 해당 내용은 청니나의 서평부분을 살짝 요약해 놓은것일뿐, 원문 글이 무엇인지 모르니 말이다. 생각해보니 민족사 연구에는 이러한 중앙-지방의 외교체계을 통한 분석도 있는데 그동안 이쪽으로는 조공책봉체계 이론만 대충보고 더 깊에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반성해야겠다. 끙...;;

주의깊게 볼 것은 "조공책봉체계"라고 부르던 "번속체계"라고 부르던, 이러한 제도의 유지는 중앙왕조의 국력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으로 지금을 보면 현재 중국의 국력이 일정이상 강하기에 티벳에 대한 강도높은 통치가 가능하지만 만약 중국의 국력이 떨어지면 이러한 변방의 공동체가 이탈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계속 중국의 국력이 유지된다면 티벳의 독립은 조금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반대로 이 이론으로는 지금 현재 티벳사태가 발생한 것이 중국의 국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예가 될수도 있다.

본인이 생각할때 해당 주장이 단지 중앙정부의 능력만을 생각하고 주변국가 혹은 민족 스스로의 변화를 무시하거나 피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남흉노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여기서는 한나라의 국력 증가라는 요인도 있지만, 흉노 내부의 분열이라는 면도 작용을 하는데 이것을 일괄적으로 중앙왕조의 실력문제로 처리하는 것은, 혹은 중앙왕조의 실력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중앙정부의 능력에 따른 주변국가 혹은 민족들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그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탐구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할것 같다. 음....근데 말은 쉽지-_-;;



오늘날 중국은 발해를 중국인들의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한국은 한국인들의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양측 모두 근대 독립국가의 개념으로 보는데, 이것은 19세기 유럽의 국가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개념은 여전히 현대의 유럽에 그 자체로는 영향력이 있지만 이미 시대에 뒤쳐진 것이다. 비록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대부분의 스위스인들이 같은 언어를 말하더라도, 그리고 한 세기를 비엔나로부터 독일의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한 같은 역사를 갖고 있더라도, 그 제국에는 체코인 또는 헝거리인을 포함되어있다. 한 언어, 한 민족, 한 국가라는 낡은 19세기의 개념은 새로 구성되는 발칸 혹은 붕괴된 소련 혹은 여전히 진행중인 티벳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특히 독일의 신성로마제국과 매우 비슷한 중국 같은 다인종국가에는 큰 문제이다.

(민족)국가(State)든 독립국가의 지위(Nationhood)이든 세기는 변해가고 있고, 현대의 사고를 고대의 시간에 적용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Parhae - A European view from afar(유럽의 관점으로 본 발해) J.Reckel(Univ. of Goettingen/Germany) , "중국 고대사 연구 - 어제와 오늘" 제 15차 국제역사교과서학술회의 중에서...

이런것을 올리면 서양학설에 매몰되었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고민해봐야겠다. 이런 개념문제는 역사학의 실제 운용해서 중요하지 않은듯 하면서, 중요하니 머리가 아프다....후...정답은 무엇일까? 혹은 정답은 없는게 아닐까?


해당 학회지에서 <중국 고대사 서술현황 고찰 - 하상주연대구축프로젝트의 기본내용을 중심으로> 조용준(청화대학 사학과)라는 글을 재미있게 보았다. 본인의 전공이 아니라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들듯하다. 해당 세미나에 참가했었으면 좋았을거 그랬다.

얻어 들은 단대공정의 문제는 연대추정을 했지만, 정확한 연대추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갑골문이나 금문의 내용을 얼마나 믿을 수 있냐는 문제부터 그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정확하냐는 문제까지 다양한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단대공정과 같이 국가적인 사업으로 최대한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상의 의문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정말 부러운 일이다. 물론 이에 정치적인 부분이 있다라는 것은 빼고, 그 자체만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중국에서 민족사를 공부하면서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문제가 고구려 문제다. 대학교때부터 역사과라고 한국분들에게 이야기 하면, 처음 듣는 이야기가 "고구려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이니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생각이 변할지 모르지만 지금 현재 내 자신의 고구려에 대한 역사관을 점검해 보는 것도 중요할듯 하다.(솔직한 마음으로는 최대한 고구려사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마음이다. 한마디로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고구려사는 고구려의 역사다.
나의 고구려에 대한 생각의 핵심이다.
고구려는 한국의 것도 아니고, 중국의 것도 아니다.
고구려사를 단지 고구려인들의 역사로 볼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이든 중국이든, 한민족이든 중화민족이든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관은 민족이라는 가상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있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만들어진 허구이기에 얼마든지 변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한국이든 한민족이든 언제인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도 동일하다. 중국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는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영토는 시간에 따라서 변한다. 절대적이지 않다. 이런 기준점이 될 수 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세운 역사가 얼마나 사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까?

물론 현재 역사학에서는 이미 "사실"이나 "진리"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의 사실을 완전히 재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 하고, 현재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일 뿐이고, 각각의 사람마다 다른 관점으로 돌아보게 되니 사실이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한편으로 맞는 소리이다. 하지만 고구려라는 나라가 존재했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런 부정될 수 없는 몇몇 사실들을 위해서 계속 공부할 생각이다. (이 부분때문에 대학교때 정말 많이도 고민했었다. 학문은 무엇인가의 "진리"을 추구하는 것인데, 진리가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었다.)

이렇게 적으면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를 중국에 내주는 것이냐라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나의 생각은 처음부터 고구려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 말은 고구려가 한국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중국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주는게 아니라는 소리이다. 원래부터 자기것이 아니었는데 멀 내주고 말고를 한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고구려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현재의 한국이든 중국이든 모두 자신들이 영향을 미친 후손들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금 내 생각은 중국의 주류학계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구려가 망한 뒤의 역사적 연관성이다. 유명한 예로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런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냐는 실질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차라리 소멸이라는 전재를 걸고 있는 김한규 교수님의 역사공동체론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공동체 자체도 어디까지나 가상적으로 설정된 개념이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핵심이 되는 역사공동의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로 실현되며 움직이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다. 혹은 기존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이용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민족이라는 개념은 너무 복잡하게 꼬여있다.여기서 더욱 구체적인 생각은 아직 못하고 있다. 계속 고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본인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고구려사가 고구려의 역사라는 기본적인 틀 속에서 움직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외교와 정치적으로는....
여기까지는 역사학적인 생각이었고, 이제 외교와 정치쪽을 보자. 지금 현재 유교제국주의라고 불려지는 중국의 모습은 아버지에게 중학교때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다. 분명히 고민해보아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일부 "관방학자"들이 정부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역사를 학문이 아닌 외교와 정치적으로 이용할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한국에서도 중국의 일부 "관방학자"들과 똑같이 받아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 역시 역사를 외교와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아탑에만 머무르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학문이 너무 뛰어나가 노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유교제국주의를 언제나 경계하겠지만, 역사학을 단지 학문적으로만 대할려고 노력할 것이다. 무엇보다 학자라는 사람들의 양심을 믿을 것이고 그것을 배울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환단고기를 완독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쯤인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환단고기를 완독하고 관련 책들을 설렵하면서 지금 소위 말하는 "환빠"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면서 환단고기와 그 관련서적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고 그냥 평범한 한국의 역사관으로 돌아가게 된다. 대신 환단고기는 나에게 역사에 대한 흥미를 주었다. 그리고 중국으로 오게 된다.

북경대학교 역사과에 들어와서도 한국의 일반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던 나는 몇몇 교수님들이 말하는 내용에 대해서 반발심같은 것이 일어났다. 그리고 중국 역사학의 문제를 열심히 성토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한국의 역사관은 과연 얼마나 옳은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관련서적을 열심히 보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였고 나온 결론이 지금의 나의 모습이다.

이러한 현재의 모습을 스스로 "중간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중국에서도 본인은 타자이며, 한국에서도 타자이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에도 속하며 한국에도 속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얻을 수 있는 보통과는 다른 관점이라는 강점을 키워야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보통과는 다르기에 쉽게 파묻힐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약점이 처절하게 드러날 수 있는 고구려사는 왠만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본인이 고구려사를 제대로 한다면 정말 강력한 강점이 되겠지만, 그러기에는 넘어야 될 산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후...역시 거란이나 투르크쪽으로 가는게 속 편할거 같다. 에휴...



해당 내용을 유머를 위한 막가파 고문 해석입니다.
엄격한 해석이 아니라는 점 염두해주셨으면 합니다.


후조의 왕 석호는 강에 다리를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사석을 던지지만 돌이 급류때문에 계속 흘러내려갔다. 500여만을 동원해도 다리를 만들지 못하자 열받아서 건설자를 죽여버렸다.

赵王虎作河桥于灵昌津,采石为中济,石下,辄随流,用功五百余万而桥不成,虎怒,斩匠而罢。


웃기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같이 미얀마에서는 해일,중국에서는 지진이라는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 나타나는 때에는 더욱 자연에 경배하게 됩니다.인간은 자연을 정복했다고 주장하지만,강은 여전히 유유히 흘러 가서 바다와 만나는군요.

지금에 와서 보면 그정도 다리도 못 만드냐라는 석호의 행동이나 조금 더 발전했다는 우리네들의 과학이나 자연 앞에서는 똑같아 보입니다.앞으로는 지진같은 재해를 예측할 수 있다고 자신이 있게 주장하시는 분들은 더욱 더 석호와 닮아 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유머용으로 고문을 대충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엄격한 해석이 아니라는 점 명심해주셨으면 합니다.


자치통감 96권

이수는 이기의 자리를 찬탈한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황제이 되라는 소리를 듣고서는 고민을 하다가 점을 보게 된다. 무당이 말하길 "몇년 동안은 천자를 할 수 있겠구나" 라고 하자

부하1은 "하루만으로도 족한데 몇년이나 해먹는다고?!"
부하 2는 "몇 년동안 천자를 하는것보다 백대동안 제후를 하는게 더 좋지 않습니까?"

그러자 우리의 이수가 한마디를 한다."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 라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한"이라고 정한다.


罗恒、解思明、李弈等劝寿称镇西将军、益州牧、成都王,称籓于晋,送邛都公于建康;任调及司马蔡兴、侍中李艳等劝寿自称帝。寿命筮之,占者曰:“可数年天子。”调喜曰:“一日尚足,况数年乎!”思明曰:“数年天子,孰与百世诸侯?”寿曰:“朝闻道,夕死可矣。”遂即皇帝位,改国号曰汉,大赦,改元汉兴。


야~~~ 이수! 그래 인생을 짦고 굵게 사는거야. 인생한방이야! 근데 아무리 그래도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그렇게 이용하는건 쫌 아니잖아. 킥킥... 하지만 니가 짦고 굵게 살아서 지금 내가 니 이름을 알고 공부하는거잖아. 근데 전에도 올렸던 글도 그렇고...안웃기면 말고...난 웃긴다고...


자제 해야될거 같아..........ㅠㅠ



유머용으로 고문을 대충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엄격한 해석이 아니라는 점 염두해두시길 바랍니다.


자치통감 95권

원래 전조의 석륵시대부터 천축승 "불도등"의 많은 예언이 맞았기 때문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석호가 후조를 세운뒤에서 계속 "불도등"을 열심히 모시는데...

이 천축승이 국가회의에 참석할때면 태자와 다른 석호의 자식들이 부축해서 회의실로 인도를 하고, 회의진행자가 큰 소리로 "큰 스님!"이라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일어났다. 


初,赵主勒以天竺僧佛图澄豫言成败,数有验,敬事之。及虎即位,奉之尤谨,衣以绫锦,乘以雕辇。朝会之日,太子、诸公扶翼上殿,主者唱“大和尚”,众坐皆起。




불교의 전파라던지 천축승이 온 경위, 북방민족에서의 불교 전파가 전투력에 미친 영향 문제등등은 냅두고 재미있었다. "큰스님"이 나오는 부분에서 열람실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푸핫" 이라고 웃어버렸다는.......머.....재미 없으면 말고...  왠지 내 자신이 한심해져.ㅠㅠ 이게 점차 미쳐가는 징조일까.....으음...


이거 보고 웃은 사람 손 좀 들어주셔요.


而在中国民族史学界,有相当数量的学者在反思和批判“文革”时期的影射史学,重新理解马克思主义历史观的同时,仍然坚持历史研究也要为现实服务,尤其是在藏学研究等一些与国家利益密切相关的领域,不仅要有较高的学术视野,还必须坚持鲜明的政治立场。因为中国是一个多民族国家,各民族在现代化建设和社会转型与发展的过程中,会遇到国际、国内、政治、经济、社会、自然等诸多深层矛盾,历史学家可以透过现实问题,去审视它的历史,探求它内在的发展规律,发现别的学科不易发现的历史内涵,为解决现实问题提供历史的经验和启示,以维护国家统一、民族团结和社会发展。许多学者注意到,在民族问题研究领域普遍存在这样一种现象,即:研究现实者缺乏历史观,研究历史者对现实不敏感和不重视。这种状况不利于为政府的决策提供有价值的参考意见,因此他们不断呼吁要加强民族史研究为现实服务的意识,认为“学术的活力在于现实的需要”,并提出“民族史发展应顺应并作用于学科格局以及社会经济、政治和文化的发展,要把自身的发展与经济建设的要求紧密地结合起来.


-- 方素梅<最近十余年的中国民族史研究> 《民族研究》2005 年第2 期


글의 문장 자체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역사학은 현실에 "복무"해야된다고 하고 있다. 역사라는 학문이 현실에 충실히 복종해야된다는 소리이며, 예로 든 것은 무려 티베트 학문이다. 물론 역사학이 너무나 학문적으로만 나아가서 연구와 실제 사람들의 지식과 전혀 다른 모습을 띄우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위한 역사연구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현재 중국에서 "역사를 역구하는 사람들이 현실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거나 중시하지 않는다"라면서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특히 이 논문은 민족학이라는 현재 국가주의의 기본적인 기반이 된다고 할 수도 있는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현실을 무시한다고 비판을 받고 있는 점을 생각해보아야될 것이다. 그리고 학자적 양심이라는 것도 생각해보아야 될 것이다. 중국도 학자다운 학자들이 많이 있다. 한국에서 일면만 보고, 그리고 중국 정부의 사항들만을 보고서 난리를 치고는 하는데, 그런 어용학자(쓰레기)들이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것이고, 실제로 학자는 어디까지나 학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역사학이 상아탑 안에서만 옹알옹알대는 것도 분명한 문제가 있다.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통속적인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될 것이다.(노력을 해도 일반인들이 관심을 안 주는...)  하지만 그것이 스스로 추구하는 "진리를 향한" 투쟁의 일부분이어야 됨을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머...학자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바보여야 되는 듯 하다.


 
아직 역사학도에 불과하지만 학자는 학자라는 생각에 왠지 뿌듯하다.





"연대기 작가라고 자칭할 때가 더 많지. 연대기 작가가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역사와 현실 중 현실 쪽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에선 야심가와 같지만, 관찰하고 해석할 뿐 참여할 수는 없다는 점에선 역사가와 같은 사람을 말하네."

"왜 참여하시지는 않습니까?"
바탈리언 남작은 잉크병을 열었다.
"관찰자로 우수한 이가 있고 행동가로 우수한 이가 있네. 난 전자야.내겐 재능과 행운이 있거든. 내 행운이야 오늘 일어난 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 이 굉장한 사건 속에 휩쓸리지는 않지만, 관찰하고 있네. 그리고 이렇게 기록도 남길 수 있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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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님께서 죽은 과거보다 살아있는 현실을 더 사랑하시는 것은 짐작합니다. 역사가가 아니라 연대기 작가가 되시기로 결심하셨으니까요. 그리고 남작님께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지 못하신 것도 압니다. 예. 언어는 말해진 순간부터 고정되겠지요. 어떻게든 이 아름다운 지금을 표현해 보려 해도, 그것은 표현된 순간부터 죽은 과거가 되겠지요."
남작은 졸음에 취하여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은 어쩌면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거기에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오스발의 목소리는 이제 산들바람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그래도 남작님은 훌륭한 연대기 작가이십니다."
"어째서-?"
"지금을 사랑하시니까요."

--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 중에서...


요즘 자주 생각나는 문장이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다. 관찰하고 해석할 뿐 과거에는 내가 참여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나는 "지금"을 너무나 사랑하나보다.  그렇다고 나는 행동하는데 필요한 능력이 없다. 그리고 용기도 없다. 그렇지만 언제나 아련하다.


관찰하자.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나의 조그마한 관찰로 현실에 조금이라도 참여할 수 있겠지.
관찰하는 능력부터 제대로 기르자.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그러니까! 괜히 공부가 안된다면서 이렇게 떠들지 말고 책이나 더 보자고!!!


저의 미천한 지식으로는 이 논문이 정식적으로 발표된 중국학자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된 《至正條格》교주본에 대한 첫 논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당 논문은 文史 2008年第1輯에 수록되어 있으며, 북경대학교의 張帆이 쓰신 評韓國學中央研究院《<至正條格>校注本》라는 제목입니다. 사실 작년에  張帆선생님 수업이 바로 이 《至正條格》이었습니다. 교실 수업에서 말씀하신 사항과 큰 차이는 없어 보였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직접 책으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해당 논문의 PDF버젼이 아직 안나온 관계로 올려드리지는 못하겠군요. 문제점 부분으로 요약하겠습니다. (칭찬이야...여기서 문제시 않은 다른 부분이 칭찬이라고 생각하면 될터이니 말입니다.--)



표점 :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교감 부분 : 수업때도 말한 사항이지만, 타교(他校)부분에서는 상당히 불만족하시더군요. 그에 비해서 이교(理校)쪽에서는 긍정적인 표현을 하셨군요. 그리고 해당 사항의 몇가지 예시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條目劃分부분에서 2가지 문제를 지적하셨는데, 지정조격의 조격 59조은 서로 분리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셨고, 반대로 斷例 233과 234는 합쳐져야 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주석부분은 완벽한 주석량은 아니지만, 일반독자에게는 괜찮을 정도의 주석이라는 평가를 내렸는데, 일반적인 관명이나 지명의 주석을 안 한 부분은 쉽게 찾을 수 있으나, 원대공문에 나오는 특수한 서술어등에 대한 주석이 아쉽다는군요. 하긴-_ 那般者같은건....

그 외에 通制條格 元典章 元史 經世大典 과 기타 공문과의 연계성에 많은 투자를 했고 성공적이지만, 내용이 더욱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대신 같은 소스 뿐만 아니라 관련내용도 분류하여서 기술한 방법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고...특히 사고전서의 원사부분에 5개의 지정조격의 내용이 있는 부분은 원래 학자들이 주의하지 못한 큰 발견이라고 했고...연대색인부분에서는 많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제 연구부분에서는 흐음...

지정조적의 서명이 정해진 계기나 지정조격의 내용부분에 대해서 한국학자들의 생각을 반박하는데, 지정조격은 한국학자들이 강조하는대로 전통몽고세력과 한화된 몽고세력간의 싸움이 아니고 단지 그동안의 복잡한 법치체계를 가다듬을 생각으로 만들어진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흐음.....자세한 내용은 직접 보시면 되겠고...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원순제 제위전기에는 상층통치계급사이에서의 충돌이 선명하지만, 이러한 충돌은 지정조격의 내용에 영향을 준지는 않았다. 지정조격은 원조 통치 계급이 원조의 통치를 계속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시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을지 몰라서 대충 적어보았습니다.
이정도 적어 놓으면 관련 분들은 다 알듯 해서 이만 줄입니다.(귀찮아서--;; )
더 자세한 사항은 역시 직접 논문을 보시는편이^^::


《代歌》《代记》和北魏国史 - 国史之狱的史学史考察

《拓跋史探》

田余庆


이 글을 읽는 이유

1) 티엔 선생님이 편하게 쓴 글이다.

2) 史风에 대한 이야기(정치의 역사에 대한 영향)에 대한 이야기 : 티엔선생님의 시대의 특수성

3) (60年代)三大才子 : 田余庆,剪伯赞,戚本禹 이 문장은 티엔선생님의 아름다운 글이 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늙었기에-_;;"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하는데, 이 글은 그렇지 않다. 이미 사료나 기타 증거로 할 수 없을때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모범적인 대답이 있다. 하지만 본인은 일단 사료나 기타 증거로 제대로 쓰는 것부터 잘 해야지 저런 경지를 바라보지. 으휴...


요약 :

이 글은 책의 맨 마지막 종합이다.

처음에 투르크의 역사를 서술한다. 이 글의 핵심은 투르크 역사는 원래 생각했던것과 다르게, 다양한 내부적인 정치권력투쟁(투르크의 외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정치권력투쟁)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선비와 오환으로 발전하게 된 투르크는, 특히 외척세력인 오환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을 하는 시기에는 외척(모후)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서 정치적 권련 배분에 문제가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척세력을 없애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적 전통이 생겨서,  원래의 모후를 다 죽여버리는 전통이 창조된다.

오환이 투르크의 초기발전에 끼친 영향은 처음으로 서술한 책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위서 역사서"에 어떻게 기술이 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한다. 특히 위서와 같은 경우 소수민족의 역사서 중에서 매우 상세하다. 그렇다면 魏收은 어떤 기준으로 이 글을 적었을까? 아마도 구전된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이 된 것이것이다.

그 예로서 崔浩을 든다. 그는 역사서를 잘못?! 서술했다가 최강막강의 권력에서 밀려난다. 역사서를 쓰고 돌에 새겨넣어서 도로에 전시하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인터넷에 올린 것인데, 문제가 되어서 난리가 난다. 이 돌도 아무곳에 묻어버리는데( ...이거 발견하면 최고일터인데....)이 문제에 대해서 周一良선생님이 이론을 내놓는다. 수집혼으로 인하여 도광에게는 조카이자 친동생인 사람이 있었다. 혹시 이 사실을 적어놓은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외척에 대한 서술을 주의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어찌되었든 이러한 최호에 대한 처리가 이후의 북위의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티엔선생님은 정치에 의한 역사간섭은 인류의 손해이자, 역사학자로서는 자신도 경험했던 괴로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代歌 --》 代记가 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이상한것이, 왜 같은 내용인데 선비어 代歌는 가능하고 崔浩가 역사로 남기는 것은 왜 안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汉化의 문제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한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孝文帝는 반대하는 아들까지 죽이기까지 한다.) 중국 주변민족은 건국과 동시에 汉化라는 문제를 안게 된다. 자신의 것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화를 안할 수도 없고...

우리가 기존에 한화를 이야기할때, 관료화라던지 복장과 같은 물질상의 것을 토론했다.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서술하지 않은 것이 당시 사람들의 정신상의 반응이다. 이 문장은 그러한 면에서 좋은 의견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댕기나 족발과 같은 것들은 중국사람들에게 이미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자신의 노인배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는 과도기에 있기 떄문이다. 그러기에 서양인들이 이러한 댕기나 족발을 거론을 하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이 북위초기 시대에도 이러하여서, 과거의 선비의 도덕관과 새로운 세대의 한족의 도덕관은 충돌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崔浩의 경우는 이 중간에서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과도기에 현재의 관점에 보아서 나쁜 과거의 것을 서술하지 않거나 모호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그래야 과도기의 고통이 적어진다. 상당히 슬픈 결론이다. 요즘 있는 티베트관련 중국인 시위와 같은 경우는 과거의 망령과 같은 무력탄압을 잊고, 없애고, 가리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과도기가 슬프기만 한것은 아니고 기쁨도 있다. 하지만...후...

그리고 반대로 지금까지의 외래 민족이 중국에서 그러하였듯이 다음세대의 티베트인들은 이제 과도기를 지나서 중국을 추종하지 않을까? 머...지금까지의 역사적 예로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지 않을까?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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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구성호와 투르크문화에서 보면 서역의 이민족들은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말이 되면 샤만-불-불교의 3대 파벌로 나누어졌을 뿐이다. 만약 이민족들이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당시 서역의 투르크가 일정정도의 문화를 보유한 것이라는 소리가 되는데,그렇다면 샤마니즘이나 불숭배도 문화라고 하면, 이러한 문화를 공유했던 북방이민족도 문화가 있다는 논리모순이 되어버린다.


한국의 족보에서는 여성을 서술하느냐 안하느냐?기억에는 하는것 같은데...으음...

내가 본 것은 근대의 족보이니 최소 조선시대 이전의 족보를 찾아봐야될듯.



中国北方民族与蒙古族祖源 1979年

중국학자중에서 북방민족의 대역사를 심도 있게 이야기한 몇 안되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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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要】流传于北魏宫掖与鲜卑贵族间的《代歌》,是拓跋族的民族史诗。道武帝时修撰的北魏早期历史《代记》,主要当是依据《代歌》。《魏书·序纪》大体是以《代记》为本。辑集《代歌》和修撰《代记》的重要人物是邓渊。由于邓渊冤死,崔浩死于国史之狱,北魏一代史学衰微,史官视修纂北魏前期历史为畏途。考察《序纪》的来历,可以看出拓跋族面对其民族早期历史的某些问题时陷入的痛苦与窘境。这是中古时期民族融合浪潮中值得重视的一个案例。
【关键词】北魏 代歌 代记 邓渊 崔浩

一、《真人代歌》释名

读魏收书,留意到《乐志》所载《代歌》问题[1]。《乐志》谓“凡乐者乐其所自生,礼不忘其本。掖庭中歌《真人代歌》,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凡一百五十章,昏晨歌之,时与丝竹合奏。郊庙宴飨亦用之。”我不懂音乐和音乐史,但是觉得代歌内容从“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看来,应该就是拓跋史诗,很有史料价值,值得读史者探究。只是歌词散失殆尽,研究《代歌》本身已不可能,只好当作史学史上的一个话题来对待,看看能否发掘出一点有用的东西。
《乐志》所说的“时”,意指代歌进入北魏乐府之时。因为代歌本是鼓吹乐,马上奏之,只有入乐府后始“与丝竹合奏”,才能脱朔漠土风而登进于庙堂宴飨。北魏始设乐府,年代甚早。魏平中山,晋伶官乐器屡经转徙遗散之后而得留存者,多入代北,理当设官司理,但只是草创而已,乐工、器物、乐谱、歌词都远不完备。辑集代歌之事似乎与设乐府大体同时,有代歌之辑即有乐府。《乐志》叙代歌事于天兴元年至天兴六年(398—403)之间。以后拓跋破赫连,平凉州,通西域,所得稍广,乐府渐有规模。孝文帝务正音声,搜求古乐,乐府始盛。乐府音声审定,器物调适,歌词取舍,编撰次第诸事,魏初邓渊首居其功,以后续成者则有高允、高闾等人。
代歌,《隋书》卷14 《音乐志》未曾特别言及。但《隋书》卷32《经籍志》小学类有《国语真歌》十卷,无解释,姚振宗《考证》亦无说。我认为应当就是指代歌一百五十章。国语即鲜卑语,代歌是用汉字写鲜卑语音而成。至于真歌之名,下面再作解释。《经籍志》还有《国语御歌》十一卷,不知是否与代歌有关系。
《旧唐书》卷 29《音乐志》、《新唐书》卷22《礼乐志》都有代歌资料,又称北歌。这是由于两唐乐志在有关部分列叙四夷之乐,入代歌于其中的北狄乐中,故有北歌之名。北魏迁洛以后对于拓跋旧物都以代、以北为称,所以北歌、代歌同义。两唐乐志都说北歌是“燕魏之际鲜卑歌”。狭义地说,所谓“燕魏之际”,当以道武帝皇始元年(396)建天子旌旗、取并州、夺中山,至天兴元年(398)克邺、灭后燕、定都平城为基准,北歌辑集当在此时;而所谓“鲜卑歌”是总括此时鲜卑各部之乐而言,包括以拓跋为主的代歌在内。广义地说,它也可能泛指十六国至北魏后期的胡歌胡乐,在燕魏之间以至魏末较长的时间之内陆续辑成。魏志所叙大体符合狭义的要求。两唐志所叙燕魏之际鲜卑歌,在这两方面都显得混乱,只能从广义方面来理解。
两唐乐志都说北魏乐府代歌,到周、隋之世与西凉乐杂奏,原有的代歌一百五十章由于只有鲜卑音而无汉译,理解者越来越少,以至逐渐失传,至唐时只存五十三章,而名目可解者只有六章。两唐乐志录有六章名目,即“慕容可汗”、“吐谷浑”、“部落稽”、“钜鹿公主”、“白净王太子”、“企喻”。郭茂倩《乐府诗集》卷25《横吹曲词》录载了几章汉译歌词。从这几章汉译歌词看来,两唐乐志所说到的代歌内容与发展情况,大大超越了《魏书·乐志》所说的代歌,所叙可解者六章与《魏书》不能吻合,时代较晚,也不是道武帝先人有关事迹。证据如下。“部落稽”,十六国时称山胡,魏时只一见,称步落坚,在《北史·尔朱荣传》中;至于正式见到步落稽的称呼,已是北周之事了[2]。“钜鹿公主”,《旧唐书·音乐志》说似是姚苌时歌,其词华音,与北歌也不合。“企喻”,据《乐府诗集》卷25引《古今乐录》,其四曲之一是苻融诗,不涉及鲜卑。所有这些,与《魏书·乐志》所说代歌“祖宗开基”、“君臣废兴”的鲜卑史实都不是一回事。不过,旧志又说“其不可解者咸多可汗之词,此即后魏世所谓簸逻廻者是也。其曲亦多可汗之词”。此事在隋志中也有相应记载,可以确认为魏世之作。隋志谓“天兴初吏部郎邓彦海(渊)奏上庙乐,创制宫悬,而钟管不备,乐章既阙,杂以簸逻廻歌”。簸逻廻即是大角及其所奏,北狄鼓吹之乐,马上用之。所谓“不可解者多可汗之词”,似内容为历代鲜卑君主言语行事,这与魏志所谓 “祖宗开基”、“君臣废兴”或者可以合辙。
以上的资料和解析,使我理解到唐乐府中的北狄乐、鲜卑乐、代歌,是三个大小范围不一的名称。北魏代歌一百五十章,唐以前多半陆续散失,也有新章羼入,所以唐志所说的代歌已不全是北魏时的原貌了。所谓唐时尚存而又可解者六章,其中的“步落稽”一章属于大范围的北狄乐(步落稽族属来源主要是南匈奴),“慕容可汗”和“吐谷浑”二章属鲜卑乐范围。只有严格意义的代歌才是拓跋歌,但也不能完全排除其它鲜卑歌包含其中,因为拓跋在推寅(即追谥宣帝的所谓前推寅)时还曾是鲜卑檀石槐势力的一部分,称西部鲜卑。唐志成书,距代北拓跋年代已远,乐府歌词变化很大,最重要的是鲜卑语言已鲜为人知,所以难于区分乐府各部分来源演变,以至于对代歌的叙述混淆不清,产生了上列的矛盾。
也许还可以这样认定,代歌是经过拓跋君主有意筛选甚或部分改造的燕魏之际鲜卑歌。筛选是按照道武帝个人意志进行的,目的是用口碑资料中的拓跋(也不排除鲜卑它部如慕容等)传说,编成歌颂先人功烈的歌谣,于代人中广为传播,为道武帝的帝业制造舆论。《乐志》所说代歌中“祖宗开基”“君臣废兴”的具体内容,道武帝正需借鉴,是他在创业时期朝夕思虑的大问题。《魏书》卷24《崔玄伯传》说其时道武帝“历问故事于玄伯”。又说“太祖常引问古今旧事,王者制度,治世之则。玄伯陈古人制作之体,及明君贤臣,往代废兴之由,甚合上意。”道武帝满心关注的有关治道的掌故,崔玄伯等人所能提供的,只限于汉人典籍所载,非拓跋旧事,而拓跋开基废兴诸事,却正是代歌的核心内容,而为此目的替道武帝筛选辑集代歌的人,从文献查找,只能找到邓渊一人。只有邓渊一人,于天兴元年冬奉命定律吕,协音乐,这势必涉及代歌;也只有邓渊一人,几年以后又受诏撰修代记,这也势必要以代歌所涉为主要资料。两唐乐志都说代歌是“都代时命宫人朝夕歌之”,所歌又尽代人之事,因而有代歌之称,迁洛以后不一定还有此需要,而且鲜卑语音大多既被遗忘,代歌也不再具备原来的意义了。
我还想用拓跋人爱歌的风习,来加强代歌是拓跋史诗,是拓跋古史资料来源的看法。拓跋爱歌的风习是历史上早已形成的,到了平城和洛阳已有汉字可供使用的年代,这种风习仍然依旧。《序纪》说拓跋先人“世事远近,人相传授,如史官之记录焉。”所谓人相传授,当是有言有歌,基本上都是口述的拓跋历史资料。一个部族,一个部落,甚至一个家庭,都有这种口述传授的资料。北魏皇帝是爱歌的。太武帝神三年(430)行幸广宁温泉,作温泉之歌以纪其事,见《世祖纪》。他令乐府歌工历颂群臣,赞美“廉如道生,智如崔浩”,见《长孙道生传》。其它臣工当各有诗歌赞颂。《文明冯太后传》载,冯太后曾与孝文帝幸灵泉池,孝文帝率群臣上寿,“太后忻然作歌,帝亦和歌,遂命群臣各言其志,于是和歌者九十人”。耆宿之臣元丕(422—503)为烈帝翳槐后人,历仕太武、景穆、文成、献文、孝文、宣武六朝,以能言“国家旧事” [3]见重于时。《北史》卷15《元丕传》:“丕声气高朗,博记国事,飨宴之际,恒居座端,必抗音大言,叙列既往成败。”孝文帝说他“亲歌述志”,当然是又说又唱了[4]。
北魏墓志中也有一些歌唱家族史传的例证。永熙二年(533)元肃墓志,记肃父扶风王怡“道勋出世,列在歌谣”[5],这种赞颂歌谣可能是乐府歌工奉命所作,如赞长孙道生、崔浩之例;也可能是贵族家传自编之作。正光五年(524)元子直墓志,说到其家世业绩“故已播在民谣,详之众口”[6]。永熙三年(东魏天平元年,534)张瓘墓,自矜其家世“吟诵两穗”[7]。这些可吟可唱的歌谣,其内容大概相当于汉人大族的家传。还可注意的是,武定八年(550)穆子岩墓志赞美先人事迹说:“家图国史,可得详言”[8]。然则贵族家世记录除歌谣以外,还有家图相配。
有一种文化现象曾令我不得其解,就是当拓跋人已进入高速汉化轨道之后,拓跋皇族人物自记其先人名字,仍旧任意用汉字写鲜卑音,而不遵循官方规范,与今本《魏书》所见多异。这也是从墓志材料中看出来的。永平四年(511)元侔墓志志阴铭文,谓墓主的六世祖为昭成皇帝;五世祖为昭成第八子受久[9];高祖常山王遵[10],字勃兜;曾祖常山康王素连;祖河涧简公于德;父悝,字纯陁。案以墓志核对《北史》卷15《常山王遵传》及《魏书》15《常山王遵传》,名字异处甚多。一,受久,本传作寿鸠;二,遵,字勃兜,本传不载其字,元昭墓志[11]则作字兜;三,素连,本传作素,元昭墓志则作连;四,于德,本传作德;五,悝字纯陁,本传不载其字。
显然,墓志所见名字当是据家传歌谣,有真实性,为常所使用者;《魏书》则当据官府文书。北魏有宗正[12],宗室人员名字,宗正必有文书记录,是在官的正式名称,却并不被本人及家族重视,因而有如上歧异出现。从这里也可推知,直到魏末,拓跋人仍不重视汉字汉语,记事仍以歌谣为准,风习未改。前引元肃墓“道勋出世,列在歌谣”,歌谣作用甚过文字叙述。顺便论及,甚至连汉字拓跋作为国姓,也未被普遍认同,西魏北周恢复胡姓,民间写拓跋为 拔。北周武成二年(560)《合方邑子百数十人造像记》所刻邑子姓名中,拓跋全作 拔,共有十余人[13],初疑这是民间讹写,一方流俗。后见镌刻精美的北周大将军李贤墓志[14],拓跋也作 拔。李贤墓志立于公元569年,此时魏收《魏书》早已修成了。从这种文化现象推知,甚至到迁洛以后,拓跋人对其祖宗开基及先人事迹的记忆,恐怕还是靠歌谣传诵为主,而不是依赖汉字记述。
现在还是回头来讨论乐府代歌本身的问题。
代歌的来源、内容,姑且作了上述的探讨。在《魏书》、《旧唐书》里,代歌叫做“真人代歌”。《新唐书》叫“真人歌”,当系省称。只有《隋书·经籍志》称之为“国语真歌”。真歌之“真”和真人代歌之“真人”,不像是同一含义。这又是怎么一回事呢?
汉音所读真字,鲜卑语中是表明人物身份称谓的字眼。《南齐书》卷57《魏虏传》中说到此语,列举了称为真的人物职称身份语词甚多,近年所出北魏文成帝南巡碑、孝文帝时司马金龙及其妻墓表刻石、北魏诸多墓志铭,以及《周书》怡峰传、薛弁传,《北史·斛律金传》等处,所举人物职称身份中均带“羽真”[15]。其它墓志中也另有带真字之例[16]。但是真歌之真与人物身份之真,似乎看不出任何关系。所以,“真歌”很可能是隋志为图简便而形成的误写,而“真人歌”和“真人代歌”才是正式的名称。

人代歌名称,我认为与真人一词有密切关系。真人自来就是道家方士一类人物时常提及的称谓。王逸注《楚辞·九思》,以真人为仙人。《魏书·官氏志》天兴三年(400)“置仙人博士官,典煮鍊百药。”天兴是辑集代歌的年代,煮鍊百药又是供道武帝服用。可见代歌冠以真人二字作为正式名称,具有道武帝的时代特征。至于这与道教有无直接关系,可能另有文章可做,这里不细究了。
《魏书·天象志》皇始元年(396):“先是有大黄星出于昴、毕之分,五十余日,慕容氏太史丞王先[17]曰:‘有真人起于燕代之间,大兵锵锵,其锋不可当’。其冬十月,黄星又见,天下莫敌。”自注:“是岁六月,木犯哭星。木,人君也,君有哭泣之事。是月,太后贺氏崩。至秋,晋帝殂。”[18]《魏书·灵徵志》记天兴四年(401)吏上言昔句注老父谓某曰:“自今以后四十二年当有圣人出于北方。时当大乐,子孙永昌,吾不及见之。”某遇老父之年为二十二岁,当前燕元玺二年(353)。以此推之,后四十二年,正当道武帝破慕容宝之岁。这些资料都说明,道武帝之兴,曾经动员不少方术之士为他制造舆论,其中最起作用的,还是王先借天象所言“真人起于燕代之间”。
皇始元年对北魏道武帝说来是个极具意义的年份[19],王先所言的这一年天象所示,就是人间变化的朕兆,真人代歌正是从此后二年邓渊着手辑集的。用拓跋正朔记后燕慕容太史丞所见天象,所言人事与拓跋帝纪又若合符契,这明明是道武帝周围之人所编造的痕迹。“大兵锵锵,其势不可当”,正是指拓跋平并州、出幽冀之兵,起于燕代之间的真人只能是道武帝。恰恰在此时出现的真人代歌,所歌颂的不是道武帝又能是谁呢?所以北魏乐府昏晨演习代歌,就是为了歌颂开国之君道武帝,以及拓跋“祖宗开基”的功业。
这些就是我认为代歌的正式名称是真人代歌的理由。代歌是拓跋史诗,又是道武帝帝业的舆论工具。同时它也承载了拓跋部人的感情,因而获得了它在这个时代应有的价值。这种文化现象,值得研究拓跋史者重视。

二、《代歌》、《代记》及其与《魏书·序纪》关系的推测

《代歌》素材来源于拓跋部民的口耳传闻。按照民族学所示的通则,这类素材总是越积越多,能说能唱,但却是杂乱芜蔓,内容矛盾。把这些长期积累的素材裁剪整理,配以合适的乐声,提升为史诗般的《代歌》,是在道武帝创建帝业的短时间里完成的。留存于《代歌》中的内容以“祖宗开基”、“君臣废兴”诸事为主,是适应道武帝本人创业治国的要求,而《代歌》的这些主要内容又正是邓渊撰修《代记》的资料依据。道武帝时拓跋部的《代歌》和《代记》这两项重大文化成果,都与邓渊有密切关系。
在道武帝以前的漫长岁月里,拓跋部社会发展缓慢,基本上停滞在“言语约束,刻契记事”[20]状态,开拓帝业的道武帝自己,也是出自结绳的野蛮人。力微以来,拓跋与外界也有接触很多的时候,所接触者或者是自幽州西渐的乌桓人,或者是以代郡、雁门郡人居多的汉人。汉人与乌桓人文明程度较高,但数量比拓跋人少,不足以在较短的时间内对拓跋部起太大的带动作用。拓跋部内缺乏各项文明制度,与道武帝经营的事业极不适应。所以当皇始、天兴的几年中,随着军事形势的大发展,拓跋部在社会、政治、文化、经济诸方面都面临转轨的急迫要求。魏收书诸《志》中多有这几年间诸项制度建树更革记载,一般都依靠人数不多的汉士的帮助。汉士如燕凤、许谦、张衮、崔玄伯等人作用最大,但除崔玄伯以外,事绩以军事谋略、政治运作居多;至于涉及文化的诸多方面,则往往另有它人专任。如音乐、官制,由邓渊司其事,史事记注也是责在邓渊。邓渊“明解制度,多识旧事”[21],是一个知识型的人才,是帮助道武帝向文治迈步的重要人物之一。
邓渊,雍州安定人,祖、父历仕苻秦,渊随父在冀州。道武得冀,以渊为著作郎、吏部郎。天兴元年(398)入代,与吏部尚书崔玄伯“参定朝仪、律令、音乐;及军国文记诏策,多渊所为”。《魏书·太祖纪》天兴元年十一月改制诸事,首列邓渊典官制,主爵品,定律吕,协音乐[22],其中前二类详见《官氏志》,当是就皇始元年“始建曹省,备置百官,封拜五等”诸事而整齐之;后二类见于《乐志》,其中重要一项当为创制庙乐,辑集《代歌》。《乐志》在邓渊定律吕、协音乐之后连叙庙乐和《代歌》,可知《代歌》辑集功在邓渊是可以肯定的。北齐时祖珽曰:拓跋初有中原,“乐操土风,未移其俗”,意指唯有鼓角,未识其它。皇始元年(396)破慕容宝,“于中山获晋乐器,不知采用,皆委弃之。天兴初,吏部郎邓彦海(邓渊)奏上庙乐,创制宫悬,而钟管不备。乐章既阙,杂以簸逻廻歌……。”[23]这就是邓渊协音乐之事。
邓渊在文化上更重要的成就,是他在戎马倥偬之际受命修史。他“明解制度,多识旧事”,具有基本的修史条件;而道武帝又是深具历史感的人,在创业兴国阶段百事俱需史鉴,而拓跋旧事比起汉典来更容易为他所理解。邓渊“性贞素,言行可复”,这也是修史人选应具有的史德条件。道武帝的“军国文记诏策,多渊所为”,其中所谓“文记”当包括今昔史料记注在内。汉士中有意搜罗记录拓跋旧事,邓渊应是第一人。
《北史》卷56《魏收传》:“始,魏初邓彦海撰《代记》十余卷”云云,这是修魏史之始。《北齐书》卷37《魏收传》全同。《魏书·邓渊传》:“太祖诏邓渊撰《国记》,渊造十余卷,惟次年月起居行事而已,未有体例。”此时北魏开国伊始,国史记注暂时只能是大事编年,全书体例还谈不到。
邓渊正式受命修史之事,本传系于邓渊与崔玄伯参定朝仪诸事之下,中隔渊“从征平阳”及赐爵加官诸语。案道武征平阳,是天兴五年(402)七月事,见卷二《太祖纪》及卷九五《姚兴传》。所以邓渊奉诏撰修国记,当在从征平阳之后,距他天兴元年入代已有四年之久[24]。邓渊株连于和跋一案赐死,而和跋被刑在天赐四年(406)四月[25],所以他兼领史职时间可以确定在402年七月以后至406年四月以前,前后不足四年。史不载道武帝命崔玄伯监修,可见当时并不理解修史是个难题,没有由崔玄伯监修的必要。
邓渊撰史,规模只有十余卷[26],属草创性质,其基本情况,有关载籍所记都一样,只是书名微异。《北史》、《北齐书》称之为《代记》,《魏书·邓渊传》、《史通·古今正史》则作《国记》。前所言及的邓渊修史以“记”为称,即邓渊所典“文记诏策”之“记”。《史通·史官建置》:“书事记言,出自当时之简;勒成删定,归于后来之笔。”《代记》年代早,自然都是根据“当时之简”,准确地说是以当时口述传闻记录为“当时之简”,所以称之为“记”是准确的,《代记》应是原始名称。《魏书》以魏为统,是北魏国史,故改《代记》为《国记》,《史通》则以唐代所见魏收书为准,亦袭称《国记》。这种差异是比较好解释的[27]。
邓渊《代记》记事包括的年代究竟有多长,载籍所见并不明确。《魏书》48《高允传》:崔浩之狱以后“世祖召允,谓曰:‘《国书》(案指崔浩监修的国史)皆崔浩作不?’允对曰:‘《太祖记》,前著作郎邓渊所撰;《先帝记》(案指《太宗明元帝纪》)及《今记》(案指《世祖太武帝纪》),臣与浩同作……。”这里把邓渊所撰之史称作《太祖记》,举以与下述《先帝记》及《今记》并列,不是用邓渊书的本名。邓渊死在道武死前三年,其时还无太祖庙号,更不可能撰成完整的《太祖记》[28],一定是后人据邓渊所撰编年记事续有斟酌增删而成。但高允所称都是诸帝之“记”,说明邓渊书名本称为“记”,或《代记》,或《国记》,这也是一证。
高允所称的《太祖记》,是严格限于道武帝本人的事迹呢,还是包括了像其它国史那样于开国之君中追叙其族姓世系以及开国以前的历史内容?我想,按中国历来修史成法,应当是后者。以邓渊其人博学而又“多识旧事”的特点,以他辑集《代歌》所获知的拓跋史诗资料,他是可以把拓跋历史梗概整理成文字的。我确信北魏之时经汉士之手保存了一些拓跋祖先资料,供以后崔浩以至魏收修史使用。最早整理拓跋祖先资料的汉士从现有资料看来,只有邓渊。
《十七史商榷》卷66“追尊二十八帝”条,谓二十八帝中惟猗 、猗卢、郁律、翳槐、什翼犍名通于晋为可据,其余凡单名者与猗等不同,疑皆道武帝时所追撰。我觉得王鸣盛所列数人以外,还有非单名者,如力微、推寅、诘汾等,其中力微之名亦见于晋代文书,所以不能一概而论。但道武帝时其先祖之名有代歌可作根据,所以断定其先祖之名大部分是邓渊辑集代歌时从鲜卑音记录而来,则是可相信的。
《魏书》卷57《高祐传》孝文帝时秘书令高祐与丞李彪等奏曰:“惟圣朝创制上古,开基《长发》,自始均以后,至于成帝,其间世数久远,是以史弗能传。臣等疏漏,忝当史职,披览《国记》,窃有志焉。愚谓自王业始基,庶事草创,皇始以降,光宅中土,宜依迁、固大体,令事类相从,纪传区别,表志殊异,如此修缀,事可备尽。……著作郎已下,请取有才用者参造国书,如其得人,三年有成矣。”
高祐等所言,是一段简略但却比较准确的拓跋先祖历史,从“披览国记”主要即邓渊《代记》而来,其内容与以后编成的魏收《魏书·序纪》所见一致,颇可窥见《国记》、《序纪》的因缘。我们且取这两者加以比较:
一,“创制上古,开基《长发》”,说的就是《序纪》黄帝后人封大鲜卑山、统幽都之北这一拓跋远古传说,如同《诗·商颂·长发》所叙殷人发祥的史诗内容。
二,“始均以后至于成帝”,世数久远,史弗能传,说的就是《序纪》始均入仕尧世,其裔不交中夏,载籍无闻,以迄于成帝毛的历史。以后道武帝追尊拓跋二十八帝,自成帝毛始,可见毛已经是道武帝认为其祖先中可信的人物,而成帝毛“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之说,也为拓跋后人所认同了。
三,“王业始基,庶事草创”,说的是《序纪》自成帝毛至圣武帝诘汾共十四帝时期。毛既可以追封,自然就是王业之始。不过人物虽然可信,事迹却是不详。只有自幽都两度南移,“九难八阻”之说,大体有今知考古材料,参照地理方位,可作印证。高祐上奏之中对此未作解释,只用“庶事草创”一语带过,说明其时除了口耳传闻以外,能见到的刻木结绳资料,未必皆能准确解读。而口耳传闻的代歌,比刻木结绳所记,应当更为可靠,更为具体。这一类拓跋祖先史实,都经过邓渊记录整理,加上他记注的道武帝事迹,共同构成邓渊《代记》,后来就基本包含在由崔浩总揽的国史之中。崔浩国史除崔浩之狱已毁的一部分以外,余下的当即高祐所说的《国记》,有三十卷之多。这种种资料,应当就是《魏书·序纪》的蓝本。
神元帝力微以下,迄于376年代国之灭,还有十四帝,高祐似皆归入“庶事草创”阶段,未作描叙。大概邓渊、崔浩所记这段历史已较详备,编年差可,不必更张[29]。这就是后来魏收书的《序纪》范围。皇始以降,北魏立国,记事日繁,制度日备,所以高祐等建议国史宜纪传表志兼备,不可仍依编年之旧。后来魏收书的全书规模就是这样,其中必定有很大的继承关系,可惜今天已无从说起了。
邓渊《代记》虽被高允称作《太祖记》,当是兼具魏收书《序纪》的全部内容,这里还有一个证据。魏收书十二帝纪,其中《序纪》在目录中排列为“本纪第一”,《太祖道武帝纪》排列为“本纪第二”,可见《序纪》是自有系统的独立存在的一纪,在魏收书中地位重要,不是附

带叙述性质。《序纪》列举的人物就是道武帝追尊的二十八帝[30]。二十八帝名字具在,世系清楚,间有大事可述,多少不等,而神元帝以后且有甲子纪年,可述大事较多。可见在邓渊书中,道武以前之事是独立成为段落的,以后就顺理成章地成为国史的前纪,也就是魏收书的《序纪》。
《序纪》应当主要就是根据《真人代歌》中“祖宗开基所由”,“君臣废兴之迹”的内容,经过邓渊《代记》的译释解读整理,才得以流传下来。《代歌》中的大事不被《代记》搜罗以致为后来《序纪》所遗的,恐怕不会很多。这也就是魏收书《序纪》在北魏史学史上极具价值的所在。根据这个事实,我认为《代歌》与《代记》同源,《代记》主要出于代歌。我还认定,辑集《代歌》、撰成《代记》的邓渊,也是《序纪》实际上的第一作者。
但是代歌是歌,代记是史,两者毕竟还有不同之处。代歌虽经筛选,难说没有一点违碍内容保存其中。但它不是直接叙事,不完全是真人真事的写实,又有音乐配制的影响和限制,所以是拓跋历史的升华。加以它用鲜卑语音,传播限于宫廷之内,汉人无从理解,所以它的内容稳定,未受政治非议。《代记》则不然,它首在实录,首在直笔,否则无以称史。正由于此,它容易受到挑剔,被当轴者疑忌,所以其作者邓渊就先于崔浩成为国史之狱的第一个牺牲者。不过邓渊人微,又值国初秩序初定,未至构成大狱,不像崔浩之狱那样引人注意,引人研究。
在思考邓渊《代记》撰写的多种细节时,我觉得邓渊之书不称《魏记》也值得一究。如前所论,邓渊撰史时间是在天兴五年至天赐四年(402—406)。据《太祖纪》,登国元年(386)元月道武帝即代王位,四月由代王改称魏王,而没有说明原因;天兴元年(398)六月经过朝臣议论,道武帝裁定国号不称代而称魏。这就是说,邓渊修国史之前已有两次明令改代为魏,而国史之名理应用国家正式名号[31],称为《魏记》才算合理,但事实并非如此。
拓跋先受晋封称代公、代王,后有实土,百余年孳生蕃息于代北之地,没有整体迁动。所以拓跋珪复国之后先称代王,符合习俗民情,是很自然的事。天兴元年(398)正式定国号称帝,经过朝议,群臣主张称代本无异议。只有崔玄伯以拓跋奄有中土,且将报聘江左为由,用旧邦维新之义,主张称魏。这很可能是崔玄伯揣度道武心意,以问作答。道武帝裁定以魏为称,并以魏帝名义昭告天地。但是代人习用旧称,而且反对向中土迁徙,连崔玄伯之子崔浩都是如此。官私称谓,都是代、魏兼用,到孝文帝迁洛之前,称代更为多见,称魏较少。何德章君《北魏国号与正统问题》[32]一文举例甚多,毋烦赘叙。所以国史以代为称而不曰魏,并不难于理解。何况邓渊于国初修史,所记尽代人代事,与整理《代歌》相近,如不称代而改称魏,反而不协于时了。
何文对于道武称魏的理由,已有论证。事实上当年曹操称魏的理由,拓跋也都考虑到了。何文留下两个他所不解的问题,一个是崔玄伯为什么以“慕容永亦进奉魏土”作为他所持称魏的理由之一,另一个是登国元年四月拓跋珪何以在甫称代王后数月即匆匆改称魏王。这两个问题是互相关联的。我现在把二者揉合在一起,试作回答。
拓跋珪复称代王,是前秦灭代十年以后的事。灭代的十年中,代北草原各部族部落经历了长期的混乱,刚复国的代王一时不可能把秩序恢复过来。其中拓跋珪最感困难的问题,是他的代王地位得不到普遍认同。与拓拔部最亲近的贺兰部和独孤部内,各自都有拥护的部落和反对的部落,拓跋珪随时要进行对反叛者的战争。最急迫的战争挑衅更是来自拓跋部内,因为拓拔部内并没有较稳定的君位传承制度,昭成帝以前,兄终弟及和父死子继总是交错出现,夹杂着残酷而复杂的斗争。拓跋珪是昭成帝的嫡孙,但珪父寔(献明帝)并未正式履位即死,昭成余子即献明诸弟存者尚多,按照兄终弟及的部族习俗,他们都有继承君位的权力。昭成幼子窟咄,是珪的季父,国灭时被掳徙长安,后因前秦之乱而随慕容永东迁并州闻喜、长子。慕容永称西燕,以窟咄为新兴太守。新兴,以地理位置言,与代北只有一山之隔;窟咄,以个人身份地位言,有继承已死的昭成帝而为代王的权力。而且他此时还有一定的实力。看来,他受慕容永命出为新兴太守,目的就是为了注视代北,相机进取。这种危殆形势,初即位的代王珪是不可能不觉察,不能不警惕的。
以《魏书》、《通鉴》等史籍互参,可以略见皇始元年正月拓跋珪即代王位以后的代北局势和代北周边局势是极为复杂多变的。皇始元年正月,可以看到三股势力同时活动。一,拓跋珪于牛川称代王;二,慕容垂在邺称帝,是为后燕;三,慕容永由长安东出,中途闻垂称帝而止驻河东闻喜,此处与邺皆为旧魏地。三足鼎立,都谋求前秦崩溃后并、幽、冀区域的统治权力。窟咄被委以新兴太守,独孤刘亢泥迎窟咄入代北与珪争位,都是此年春季的事。四月,珪由代王改称魏王;六月,慕容永遂称藩于后燕慕容垂。这暗示慕容永、慕容垂有可能联合共击拓跋珪。十月,慕容永进驻长子,是为西燕。长子和闻喜一样为旧魏之地。这表明拓跋周边彼此戒备的力量,全是驻在旧魏之地。拓跋珪其所以在此时匆忙改称魏王,意在表示代地魏地都应当由他统辖,既警告慕容永,也警告拓跋窟咄,不许插足其间,不得侵犯代北。至于慕容垂,他不能容忍自长安外奔的慕容永以及附属于永的拓跋窟咄染指幽、并。是冬,拓跋珪联络慕容垂大败入侵的拓跋窟咄,代北局势才得以初步稳定[33]。
慕容永等东来时颇有军力,但无退路。当慕容永求入冀、幽不成,北上代北受阻,只得龟缩于长子一隅,还不时受到后燕压力之时,处境是艰难的。所以可以理解,《太祖纪》登国七年(392)十二月所载“慕容永遣使朝贡”之事,就是西燕怵于后燕压力,求代为与国以图存的表示[34]。同时也可以理解,天兴元年(398)道武帝在邺再议国号时崔玄伯所说“慕容永亦进奉魏土”,所指即此。至于“进奉魏土”,虚词而已,并无实事。所谓魏土,即指闻喜、长子。崔玄伯所谓奄有中土,旧邦维新,也是此义,只是地面更广而已。
综观前后,皇始元年,拓跋窟咄随慕容永入闻喜,拓跋珪敏锐地感到来者不善,立即表示他自己是魏土之王,改国号曰魏;登国七年,慕容永遣使北魏,也许真有过愿以长子魏土“进奉”的口头表示;天兴元年,拓跋珪又获得了旧魏要地邺城。把这些资料合起来看,研究所谓代、魏之辩问题,岂不是多了一重思路吗?何文遗下他所不解的两个问题,到此是不是算解决了呢?
以上,由探索《代歌》、《代记》同源及其与《魏书·序纪》关系,进入到所谓代、魏之辩的疑难之点及其解决门路。从这里我又想到,正史中对本朝先世历史追溯能做到像《序纪》这样既相当久远又比较准确,还以其“得体”[35]而受到四库馆臣的称赞,是少见的。追根溯源,拓跋古史中的这一特异之处,不能不归于国初邓渊同时完成辑集史诗《代歌》和记注古史《代记》的开创性成就。

三、国史狱事造成的史风问题

我留意考察邓渊之狱对北魏一朝修史的长远影响,是受到台湾青年学者陈识仁《北魏修史略论》[36]一文的启发。陈文看重邓渊之死是道武帝猜疑的结果;又提出崔浩国史之狱对北魏修史造成影响。这两点立意我都赞成,只是觉得两者之间似乎有某种关系,而陈文未曾措意。我现在进一步思考的是,第一,邓渊一介书生,不涉权势,要是真有什么事引起道武帝猜疑的话,最可能是修史中出现了敏感问题;第二,国史之狱影响北魏一百余年,历来把这笔帐从崔浩之狱算起,我看应以邓渊之狱为始。邓渊是受命修史的第一人,其狱事内容与崔浩基本一致,崔浩之狱正是邓渊之狱滥觞所及的结果。
《魏书》卷24《邓渊传》,渊从父弟晖坐和跋案,“太祖疑渊知情,遂赐渊死”。和跋[37],代人,世领部落[38],与拓跋部关系久远,随道武帝,以武功显。天兴元年(398)和跋以行台尚书镇邺;邓渊从弟晖为行台尚书郎,与和跋“厚善”。道武杀和跋,罪名是修虚誉,性奢淫。“修虚誉”云云,罪名空泛,可重可轻,毕竟不是犯上作乱一类死罪。邓渊是新附文臣,一直“谨于朝事,未尝忤旨”,史臣叹其“贞白干事,才业秉笔,祸非所罪,悲哉!”邓渊之死不但时人愍惜,道武本人也是“既而恨之”。由此可见邓渊之冤昭然在人耳目,但冤情底蕴却迄今无人探究。
《魏书》卷 125之二《天象志》,天赐四年(406)四月“诛定陵公和跋”。邓渊赐死当是紧接其后之事。邓渊《代记》记事,最晚当止于此年,下距道武帝之死还有三年半的时间。道武帝死于天赐六年(409)十月,年三十九,算是盛年之君。但他自幼多艰,历经波折,从复称代王到建立帝业,历二十四年之久,在政治上已到晚期,是嚆矢之末了。天兴五年(402)阳平之役获胜,道武帝驰骋疆埸生活从此结束,此后他思虑所及,多是“追思既往成败得失”,以及穷思如何跳出拓跋历史争位斗争的老路,实现帝位的平稳传承。这是一个非常棘手,很难决断的问题。道武晚年多猜疑忌妒,当与此有密切关系。而邓渊奉命修史,恰恰就在这个时候。
无力执政的道武帝,寄情校猎于新筑的犲山离宫,有时一年行幸三次之多,每次长达数月。他嗜服寒食散,药动颠狂不已。天灾变异使他恐惧,但更多的恐惧是政治性的事件。这种身心状态加重了他喜怒乖异,杀戮无节。邓渊之死也就是在道武帝这种心态下发生的。
据《官氏志》,天兴四年(401)九月“罢外兰台御史,总属内省”。可知邓渊天兴五年居馆职之时,是内省官员,修史事务,包括史实的搜求、翻译、斟酌、取舍,巨细无遗,都是在道武帝眼下进行。道武帝是一个深具历史感的人,对于拓跋旧事之可资借鉴者是非常留意的。崔玄伯对他谈论的许多汉典故事,虽然对他有启迪之处,但毕竟是隔了一层。而拓跋故事中本有许多可以资治者,道武帝更易理解,可以产生联想,直接利用。但这些保存于刻契结绳中的拓跋旧事,需要专门的人来解读;拓跋先人的口碑歌谣在史官中编辑使用,也先得翻译成汉文。所以《史通·史官建置》中说:“当代都之时,史臣每上奉王言,下询国俗,兼取工于翻译者,来直史曹。”邓渊供职史馆,必然也是“上奉王言”,即听取道武指授;“下询国俗”,即了解拓跋旧事,包括寻绎《代歌》,经过翻译由汉字记录,备国史采用。《邓渊传》史臣谓渊“才业秉笔”,这正是史臣的日常职分所在,也正是道武帝不时指授检核之处。道武帝喜怒乖常,史实中疑窦之生,全在乎他一念之萌,而史臣也许并未经意,它人更难理解。我推定邓渊死于修史之狱,就是从这里出发的。这是一场所谓腹诽之狱,一场不动声色的文字狱。它以诬枉之词定谳,后人不能确指原因,又不信坐和跋案的谰言,只能让它成为一樁不明不白的公案。邓渊人物不显,其死事又在国初,魏史中论及者少,后来又被更大的崔浩之狱遮掩,所以后世留意及此的人就少而又少了。
邓渊《代记》可能包含什么样的敏感问题,以至形成北魏头一樁国史之狱呢?据《邓渊传》,渊造《国记》(案当时的本名是《代记》)十余卷,“惟次年月起居行事而已,未有体例。”按史官修国史成例,这只是一种草创,后人谓之长编,今人所称初稿。刘知几之言曰:“书事记言,出自当时之简;勒成删定,归于后来之笔。然则当时草创者资乎博闻实录,若董狐、南史是也;后来经始者,贵乎儁识通才,若班固、陈寿是也。”邓渊之书显然只是史实排比的实录,以待后之儁识通才删定勒成,一般不会有雌黄褒贬。连所谓“当时之简”,也只是临时自鲜卑语翻译而成,并无现成简牍可用。如果此中出现口实,不过是译文中事实取舍而已。邓渊主持而成的译文中,不大可能有所谓“春秋笔法”问题,因为如前所说,邓渊贞白干事,未尝忤旨,亦无权势背景,遇到敏感问题,一定是小心处理,以避嫌忌。

而且,《代记》虽被称作《太祖记》,当包括拓跋先世事迹,相当于魏收书中的《序纪》;而真正的《太祖记》部分最多只记到天赐四年,并未完成。如果邓渊书被认定有问题,只能是出在拓跋先世和道武帝本人至天赐四年为止的这个时间段里,而此时间段内道武之史是当世之事,道武亲自过问,估计难产生嫌疑;而道武先人事迹,相当于魏收书的《序纪》部分,则其事其言已久历时日,滋生嫌疑的可能要多一点。现在就来看能否找到一些蛛丝马迹。
不少学者认为崔浩国史之狱所谓“备而不典”、“暴扬国恶”,是指国史所录的一些拓跋故事,在昔本为旧俗使然,无关风化,在今则不合常道,有悖人伦。史臣直笔招祸,最易在此方面产生。周一良先生《崔浩国史之狱》[39]判断献明帝死后贺后被其父昭成帝收娶,所以贺后先后所生既有献明帝之子,又有昭成帝之子,诸人行辈既为兄弟,又为叔侄。这在北俗中蒸报之事本无所嫌,如果《代歌》中有此等内容,也不一定会受到注意,可是记入《代记》,诸人行辈混乱所涉人伦问题就暴露出来了。我自己在考察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时,对此现象也有所发现,有所议论。国史所记这类本无足异的拓跋旧事,在道武帝成为专制帝王以后极易成为定罪口实,崔浩国史中的“不典”、“国恶”,的确可以从此得到解释。进一步说,这些口实,当以道武建国以前所传而迻译所得者居多,记载这些事的国史,并非崔浩新撰而是已有的邓渊《代记》。因为邓渊有《代歌》参考而崔浩则不可能有新的资料可据,不能凭空造成。我认为崔浩之狱滥觞于邓渊之狱,这是一个重要理据。至于在两次狱事中究竟是哪一个具体问题形成道武帝和太武帝的痛点,是否每次还有更为直接的兴狱的政治需要,由于资料缺乏,本文不拟探讨。
还有一个值得思索的现象,就是太武帝恢复史馆以后,修史之事与以前邓渊相比较,进展非常缓慢,似乎有某种障碍存在。案邓渊死在天赐四年(406),太武帝恢复史馆在神二年(429),其间二十余年国史“废而不述”;崔浩书成而大狱兴,在太平真君十一年(450),其间又是二十年有余,新纂成者除补足的《道武纪》以外,不过是《明元纪》、《太武纪》(未竣)而已。时日迁延太久,令人生疑。其中原由,我们先从太武帝修国史二诏试作分析。
据《崔浩传》,太武事功有成,神二年“诏集诸文人撰录国书,浩及弟览、高谠、邓颖、晁继、范亨、黄辅等共参著作,叙成《国书》三十卷。”此为前诏。太延五年(439)太武帝平凉州,完成了大功业,于是诏崔浩监修国史,大意说神后戎旗仍举,而“史阙其职,篇籍不著,每惧斯事之坠焉”。所以采取特别措施,“命公留台综理史务,述成此书,务从实录。”此为专门给崔浩之诏,我称之为后诏。二诏不同之处,一是后诏崔浩留台监秘书事,综理史务,并以中书侍郎高允、散骑侍郎张伟参著作,这就是专人专责,提高史臣档次,务期于成,而不是像前诏那样,诸人共参著作,崔浩只是参与者之一厕列其间而已;二是后诏提出特别的编纂要求,这就是“务从实录”,这是前诏所没有的。至于前诏所说“叙成《国书》三十卷”或是预期之词,实际上当时未曾完成而完成于后诏之后,所以后诏才说此前“史阙其职,篇籍不著”。
细审二诏,我认为修史难成,障碍在于史臣趑趄不前。太武帝前诏以一般事务看待修史之事,并未特予重视,对障碍也没有估计。趑趄不前的原因,我认为是邓渊史狱遗留下巨大影响,其中关键又是史臣不敢直笔实录。所以后诏才强调“务从实录”,实际上是太武帝亲自承诺不会重复出现邓渊史狱,以安史臣之心。
邓渊“祸非其罪”,必修史有所违碍,只是谁都不便明言。这是史臣寒心之事,是明元帝一朝史事“废而不述”,太武帝时仍然“篇籍不著”的真正原因。太武帝前诏所命史官,邓渊之子邓颖就在其中,这可能是太武帝故作无事的一种姿态,但事实上会产生负面影响。太武帝后诏正是针对此中问题,针对史臣缄口裹足,惟恐愆失心态而发。后诏特命有地位、有担当、有能力的大臣崔浩总监其事,也是表示有事可由崔浩负责,不致牵连史臣。一般说来,修史中是非得失的评骘,惶惶中的文士或可藏而不露,但是据实录文,文士逃避责任的余地很小。所以“务从实录”一语,加上崔浩总监,应当能释史臣重负,让他们安心著述。
崔浩本来是有德于太武帝的,太武帝得以早为储君,抚军监国,以至于为国副主,就是出于崔浩向明元帝的力荐。崔浩极富军国智谋,迭有大功,太武帝令歌工历颂群臣,有“智如崔浩”之颂。而且崔浩在朝谨敬避嫌,“以示不敢犯国”,甚至早在道武帝杀戮无节,左右力求逃隐之时,崔浩随侍左右,“独恭勤不怠,或终日不归”。他是邓渊之狱的目击者。所以用他综理史事,应该是最合适的人选,是推动史臣尽力著述的重要一步。他本人应该是深知太武帝对他的知遇之恩的。
崔浩不负所托,受命十年,国史告成。道武纪及拓跋先人追叙部分以邓渊《代记》为蓝本而有所加工,所谓“删定勒成之笔”,当出崔浩。邓渊死后道武纪所缺部分自然也由崔浩续成。太宗明元帝及世祖太武帝纪由崔浩、高允同撰。三纪的注疏高允居多,总裁在崔浩[40]。从后来崔浩罹大狱而高允无罪的情节看来,除了景穆极力保护高允以外,也许还有别的原因,例如所谓“备而不典”问题不出在太宗、世祖二纪,而出在崔浩续成太祖纪中;不出在各纪注疏而出在选材综理方面,等等。前有邓渊之狱,崔浩又蹈覆辙,我看只能从崔浩当真执行“务从实录”寻求解释。
崔浩总裁史事,首在破邓渊狱后史臣裹足局面,一切惟“务从实录”是崇,显示自己忠于太武帝的付托。而竞趋之士为了迎合崔浩,更以国史刊石立衢,“欲彰浩直笔之迹”。古来权势宠幸者于臣君相与之际,有时未达一间,酿成事端,自贻伊戚。智如崔浩,也不免忘乎所以,竟不思伴虎之谚。所以高允议论刊石诸事,“分寸之间,恐为崔浩万世之祸”。希君之旨以实录为依归,以直笔相标榜者,终于栽倒在直笔之下!人主的复杂心态使希旨者祸福无常,给史学造成祸害,问题不正是出在“分寸之间”吗?
古书所见,有一类智者以“揣摩之才”见长。赵国虞卿作《虞氏春秋》八篇[41]“以刺讥国家得失”,其中有“揣摩”一篇。隋代杨素称赞封伦善于揣摩,史臣称封“多揣摩之才”[42]。崔浩盖亦封伦之俦,揣摩人主之意而遭反噬,成为千古史坛话题。崔浩以直笔、实录获谴,不悖于史德。但他并不理解太武帝所言“务从实录”,除了有惩于邓渊狱事外,还有他的理解与需要。诚如《史通·序传》所说:“苟能隐己之短,称其所长,斯言不谬,即为实录。”“盛矜于己而厚辱于先”,那就难保不取祸了。当拓跋君主尚生活在名教以外之时,先人事迹无涉荣辱,无大违碍,而当皇权在握,礼法人伦成为衡量准则之时,所谓实录也就是另有尺寸了。如若不然,皇权就要裁剪史法,约束史家。这也是研究中国史学史的一个值得思考的问题。
实录之说始自刘向等人赞誉太史公书之“其言直,其事核,不虚美,不隐恶”,从此实录被尊崇为史德之首。至于著史冠实录之名,唐宋定实录之制,明清开实录之馆,历代相仍,有保存史料之功,但难说都能遵循太史公之所界定。刘知几以张俨《默记》、孙盛《晋阳秋》为例,“以验世途之多隘,知实录之难遇也”。[43]他感叹“古来唯闻以直笔见诛,不闻以曲词获罪” [44],这似乎就是暗指崔浩狱事。
史馆再开以后,直笔仍然是修国史中的大问题。孝文帝尝谓史官当“直书史实,无讳国恶”[45],但史官自有忖度,趋避在己,再也不会出现邓渊,更不会出现崔浩。韩显宗答孝文帝之问,自诩“直笔而无惧”[46],但实际上却无寸进。近一个世纪中史官备位,少有著述,崔光直云“但须记录时事,以待后人”[47];崔鸿撰《十六国春秋》,以其涉国初事,惧其言多失体,迟不敢行[48]。邓渊、崔浩事件阴影难消,国史之学难振。尔朱荣入洛后竟有山伟、綦儁等倡言“国书正应国人(案指代人)修缉,不宜委之余人”,以至二十余年中代人掌史事,一无所成。及至东魏魏收受修史之命,执政者所关注议论,忧心所在仍是直笔问题。他们自然知道不许直笔则无史可言,允许直笔又惧扇扬褒贬。高欢戏语魏收“我后世身名在卿手”;魏收言志,故意标榜“臣愿得直笔东观”[49]。高洋效法孝文帝之意,直言“好直笔,我终不作魏太武,诛史官”[50]。诛史官之始作俑者实际上是道武帝,此时其事已被人淡忘了。这些资料陈识仁的文章都已引用,无烦多说。只是附加一句话:修国史引出如此纷纭,历代少见,追根溯源,还是北魏史风造成,这种史风正是国史狱事不可避免的后果。
魏收著史,时过境迁,拓跋先人行事已失去敏感性,所以收书中得以保留一篇《序纪》,分量虽然不大,迄今仍为研究拓跋先人历史唯一重要资料,而且是基本上经得起验证的资料。经过邓渊、崔浩两案以后,《序纪》中的资料一定有不少磨合删削,在相当程度上已失去从鲜卑语迻译时的原始面貌。但是五胡诸载记之中,还不见有保存先人历史资料像《序纪》那样系统准确之例。只是自邓渊、崔浩以来百余年中史风污染,当途者既求誉于国史,又畏国史之毁;既不能不标榜直笔实录,又吹毛求疵于直笔实录之中。风气积久,洗之愈难。不止是帝王干预修史,连权势之辈都想利用国史巩固家族地位,多求史官为先人作佳传。这就是《史通·直书》所说史臣也只有“宁顺从以保吉,不违忤以受害。”魏收的一部《魏书》,虽不远于是非,但亦难免无疵,未行时已多纠纷,刊布后被指责为“秽史”,以至于历代学者屡起为魏收辨诬。在我看来,这也是北魏史风污染的一种后果。

行文既竟,还有几句赘语。近年我所作拓跋早期历史研究的几篇文章,某些环节找不到确证,因而有推测成分,论述难得周全准确,大体都随处注出了。本文也是如此。对邓渊狱事性质的判定,旁征颇有,但迄今找不到直接证明,而以下行文与此点关系较大。这在逻辑上是犯了“丐词”的毛病。我想,古史中有大量“待垦荒地”,由于直接资料缺乏,研究难于下手,历史的空白点难于填充,杂乱的现象难于作出说明。出于这种考虑,我把此文(以及其它相关文章)作为研究拓跋历史的一种思路,一种探寻,而不是作为确凿的结论奉献给读者,希望能起到一点从空白处、从杂乱中探索拓跋历史问题的促进作用。果能如此,此文本身即令言而不中,我觉得还是值得的。也许,这可以从“得鱼忘筌”、“得意忘言”之义来理解吧。

[1]拙著《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的形成和演变》曾出一长注解释“代歌”问题,但未细究。
[2]参唐长孺《魏晋杂胡考·步落稽》,《魏晋南北朝史论丛》。
[3]《魏书》卷108之三《礼志》三。
[4]阎步克教授见告,北魏的太常乐户,属杂户之一种,数量不少,可以视为拓跋朝野崇尚乐舞的佐证。我同意这个说法。
[5]赵超《汉魏南北朝墓誌彙编》(以下简称《汇编》),天津古籍出版社,1992年, 303页。元怡、元肃,景穆帝之后,《魏书》卷19下有传。本文所用赵超《汇编》资料,均分别与中州古籍出版社1989年版《北京图书馆藏中国历代石刻拓本汇编》第3、4、5、6册所刊拓本对勘。
[6]

FONT>《汇编》,150页。
[7]《汇编》,314 页。张瓘并非代人,大概是受代风影响而作此说,也可能只是自饰家世而已,并非真有可吟可唱的歌谣。案墓主此年七月死,正朔在北魏,十一月葬,已属东魏正朔了。
[8]《汇编》,381页。此墓志《北京图书馆藏中国历代石刻拓本汇编》未收。
[9]元侔墓志见《汇编》60页。据《北史》卷15,“昭成帝九子,庶长曰寔君,次曰献明帝寔,次曰秦王翰,次曰阏婆,次曰寿鸠,次曰纥根,次曰地干,次曰力真,次曰窟咄。”此受久即寿鸠,居第五,而墓志则谓为第八子。按罗振玉《丙寅稿》已注意到《魏书·宗室传》所载此世系与墓志有异。岑仲勉《元和姓纂四校记》(1994年整理本,中华书局,401页)亦略有说。又,《元和姓纂》引此世系中有名翰者,即秦王翰,《北史》作地干。
[10]《魏书》此卷据《北史》及它书补,而《北史》与今本《魏书》又有世系歧异处。点校本《魏书》校勘记据赵万里说,以此歧异处《北史》是而《魏书》非。
[11]元昭为昭成帝玄孙,志见赵超《汇编》页146。
[12]《魏书·官氏志》,宗正,六卿之一,第二品上。《汇编》140页元斌墓志,斌为景穆帝曾孙,官宗正丞,“器识闲雅,风韵高奇,澹尔自深,攸然独远”,完全是汉人名士气质。这样的知识分子拓跋人中还很少见。
[13]马长寿《碑铭所见前秦至隋初的关中部族》。页57—59,中华书局,1985。碑在陕西渭北下邽镇。
[14]据《原州古墓集成》,文物出版社,1999。
[15]近见日本学者松下宪一提交北朝史国际学术会议论文《北魏內朝制度考略》,所辑史籍及墓志中带有羽真号者有十六例。羽真一词迄今尚无确解。松下认为系北魏爵名以赐内附者。但上举各例多有于羽真之外另有爵名,而且还有皇族人物,则羽真之义毕竟难于确认。
[16]文成帝南巡碑尚有折纥真、斛洛真。另外,《汇编》267页比和真, 294页他莫汗真,365俟勤真,是否都是人物职称身份之词,不敢肯定。
[17]王先《魏书》只此一见。《晋书·苻坚载纪》记淝战中苻融陷寿春,执晋安丰太守王先。二王先年代相近,不知是否一人。
[18]《天象志》此卷魏收书亡,后人取张太素书补入,参点校本校勘记。此年天象志既记北事(贺太后崩),又记南事(晋帝殂),盖此时已开始有了南北两分认识,参见下注。
[19]《魏书·乐志》释皇始为开大始祖之业;《通鉴》胡注认为“南北之形”定于此年;正光二年杨氏墓志有“皇始之初,南北两分”之语(见赵万里《集释》及赵超《彙编》)。《天象志》(三)天兴元年(398)十二月“群臣上尊号,正元日,遂禋上帝于南郊。由是魏为北帝,而晋氏为南帝。案初上尊号是皇始元年事,即帝位在天兴元年,大抵北帝、南帝之形定于皇始,制度确定实施则在天兴。
[20]《魏书》111《刑罚志》。
[21]《魏书》24邓渊传。
[22]其下还列仪曹郎中董谧撰郊庙、社稷、朝觐、宴飨之议,三公郎中王德定律令、申科禁,太史令晁崇造浑仪、考天象。连同邓渊在内,都是当时各有专长的汉士。吏部尚书崔玄伯则总而裁之。
[23]《隋书》14《音乐志》中载北齐祖珽上书之言。
[24]陈识仁《北魏修史略论》(见《结网编》,台湾东大图书公司1998)237页文中,参考杨翼骧编《中国史学史资料编年(一)》(南开大学出版社,1987),断邓渊受命修史在天兴元年(398),似可酌。
[25]见《魏书·天象志》。事详后。
[26]《史通·古今正史》作十卷。
[27]《南齐书·魏虏传》谓平城“西三里刻石写五经及其国记”。此盖南人据传闻崔浩刻国史事,其国史亦称“国记”。称史书为记,《史记》、《东观汉记》都是例证。
[28]太武帝时,太祖这一庙号还是指平文帝;道武帝从烈祖之称改称太祖,是孝文帝太和十五年事。高允在太武帝时何得用太祖之号称呼道武帝?所以这整段文字都是经过后人改写的,不是太武帝时的原状。
[29]《魏书》卷62《李彪传》“自成帝以来至于太和,崔浩、高允著述《国书》,编年序录,如《春秋》之体,遗落时事,三无一存。彪与秘书令高祐始奏从迁、固之体,创为纪传表志之目焉。”修史人物不列邓渊,只能说明邓渊《代记》内容已被崔浩、高允之书吸收了。“三无一存”之说是笼统估计,以情理言,当是年代愈早,存者愈少。
[30] 参《十七史商榷》66“追尊二十八帝”条。《序纪》中只有二十七帝之名,是由于昭成帝之子、道武帝之父寔,未立早死,只附见于《序纪》昭成三十四年而未独立立目之故。
[31]例如《礼志》(一)天兴元年道武帝即帝位祭天地,理当用正式国号,故祝辞用“惟神祇其丕祚于魏室”之语。
[32]《历史研究》1992.3.何文着重分析拓跋力求争神州正统,改代为魏,守旧者则仍以代为称。称魏称代,何文举证甚多,文献墓铭均有。
[33]《通鉴》记永入长子即位在前,窟咄败亡在后,《本纪》记二事先后相反。实际上这大致是同时发生的事。
[34]代国无力助西燕抗衡后燕,西燕终于在394年为后燕所灭。
[35]《四库全书总目提要》史部《三国志》条。
[36]见《结网编》,台北市东大图书公司出版,1998。
[37]《魏书·官氏志》神元时内入诸姓有“素和氏,后改和氏”,和跋历代当世领素和部落。《元和姓纂》卷8去声十一暮,素和氏:“后魏有尚书素和跋。”
[38]和跋部落所驻,可以考知。《和跋传》太祖校猎豺山,“群臣佥言跋世居此土,祠冢犹存”。据《读史方舆纪要》卷40,豺山在善无,今山西右玉境,但有异说。
[39]见周著《魏晋南北朝史札记》,中华书局,1985。
[40]与高允同参考作的张伟,从其本传看,不但未罹刑罪,甚至未提及参预修史之事。大概张伟在后诏中虽有其名,而实际上未尝参与。
[41]《史记》卷76《虞卿列传》。《汉书》卷30 《艺文志》著录《虞氏春秋》十五篇,另有《虞氏微传》二篇。
[42]《旧唐书》卷3《封伦传》。
[43]《史通通释·直书》。
[44]《史通通释·曲笔》。参同书《疑古》引《孟子》和汉景帝、魏文帝之言。
[45]《魏书》卷7《高祖纪》(下)
[46]《魏书》卷60《韩麒麟传》附显宗传。
[47]《魏书》卷67《崔光传》附崔鸿传。
[48]同上。
[49]《北史》卷56《魏收传》。
[50]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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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宝国:读《拓跋史探》

田余庆先生新作《拓跋史探》已于2003年3月由三联书店出版。全书24万字,主要讨论了三个方面的问题。第一,北魏子贵母死制度与离散部落的关系。第二,拓跋与乌桓共生的问题。第三,《代歌》、《代记》与《魏书》序纪的关系。我认为,其中第一部分是全书最为重要、最为精彩的部分。以下的讨论主要围绕这部分展开。 
关于北魏子贵母死这一现象,前人早已注意到。赵翼说:“立太子先杀其母之例,实自道武始也。”(《廿二史札记》卷一三“《魏书》纪传互异处”。)周一良先生说:“拓跋氏入中原前之旧制,凡其子立为太子者,母妃先赐死,至孝文帝母犹因此而被杀。但北方其他少数民族未闻有此风俗。且游牧部落亦不如封建王朝之易于发生母后专权之例,其来源尚待研究。”(《魏晋南北朝史札记》)韩国学者朴汉济对此提出过一个解释。他认为,子贵母死既非拓跋旧法,也非汉制,而是北魏胡汉体制中的特殊事物,其目的是为了加强皇权。(朴说见田书所引)这个解释是不错的。 
关于北魏离散部落,《魏书》中一共有三条记载。《魏书》卷一一三《官氏志》:“登国初,太祖散诸部落,始同为编民。”《魏书》卷一○三《高车传》:“太祖时,分散诸部,唯高车以类粗犷,不任使役,故得别为部落。”《魏书》卷八三上《贺讷传》:“其后离散诸部,分土定居,不听迁徙,其君长大人皆同编户。”对于道武帝离散部落,分土定居之举,研究者多从拓跋社会由部落联盟向国家转变这个大的时代背景下求得解释。这个解释也是不错的。 
总之,不论是子贵母死,还是离散部落,都是老问题了,而且也都有了不错的解释。不过事情常常是这样的,不错的解释往往对我们妨碍最大,因为它使得我们有理由停下来,不再进一步思考。田余庆先生的可贵之处却恰恰是不满足于此,而是按他惯常的思考习惯,在一般人停下来的地方继续穷追不舍。他指出:“拓跋鲜卑,相对于先后兴起的其他胡族说来,是一个发展缓慢的部族。东汉桓帝时拓跋南迁,‘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群体庞大松散。汉末建安年间拓跋诘汾再次南迁,部落联盟更扩大了。《魏书·官氏志》所谓‘七族’、‘十姓’,是拓跋部落联盟新形成的核心,血统亲近,‘百世不婚’。拓跋部作为联盟领袖,其后妃必取之于七族、十姓以外的部落,其女子也必于七族、十姓以外择偶。因此,在一定的时间内,可能出现一些与拓跋部世代为婚的部族,形成于拓跋部的特殊关系;由于君权不张,拓跋后妃也就自然而然地居间起着联络作用,甚至有可能成为维系拓跋部落联盟的关键人物。”(24-25页)在本书的另一处,作者明确写道: “道武帝建国,并没有强大的外界敌人要去认真对付,真正棘手的倒是他的母族部落和妻族部落,甚至还有他自己的母、妻。这一现象令我恍然大悟,原来道武帝用战争手段”离散部落“,首当其冲的竟是母族贺兰和妻族独孤,这并不是偶然的现象。打破部落联盟的束缚,建立帝国,是此举直接的,急切的原因。至于更为根本的社会原因,如部落役使之类,在当时似乎是第二位的。……离散部落之举和子贵母死制度看似无涉,却是内蕴相通,后者是前者的后续措施。”(3页)至此我们看到,作者从他独特的思考角度出发,终于把本来属于皇室内部的子贵母死制度与看似毫不相干的离散部落问题结合了起来。两个问题的结合真可谓互相发明,相得益彰。如果没有联系到离散部落,关于子贵母死的问题实际上已经无话可说;如果没有联系到子贵母死,离散部落的问题就难以落到实处,而只能是国家形成理论的一个具体例证而已。 
诗歌语言中有所谓“陌生化”之说。一位诗人朋友曾就此向我解释说,“形式主义”批评家们提出过一个概念。他们认为文学,这里主要指诗歌,目的就是要把语言“陌生化”,也就是说,让语言能够给人以新的刺激,提供看待世界的新角度。借用这样一个概念,我们不妨说,田余庆先生也是把我们熟悉的问题陌生化了。在原本已经题无剩义之处开掘出了新的局面,提供了新的思考动力。不过我这里要强调的是,诗歌语言的“陌生化”是诗人的有意追求,而田余庆先生的“陌生化”却并非刻意为之,而只是他研究工作的客观结果而已。 
与陌生化的结果相反,对于熟悉他研究特点的人来说,作者在书中所使用的研究方法是一点也不陌生的。这个方法是什么呢?其实就是政治史的方法。我们知道,在《东晋门阀政治》一书中,作者曾研究了南方几大家族的政治关系,而在《拓跋史探》一书中,作者研究的则是北方几大部族的政治关系。这本书的各个部分总括起来说,实际上就是一部拓跋早期政治史。众所周知,年鉴学派重视长时段,而对于属于短时段的政治史则比较轻视,认为是“转瞬即逝的尘埃”。这个思想对我影响很大,所以在以前写的《读<东晋门阀政治>》一文中,较多地指出单纯政治史的缺陷。但是读了《拓跋史探》,我却感到政治史的方法也有它不容忽视的长处。政治史虽然不能解释一切,但从此入手,却也可以发现并解释民族史上的很多重要问题。具体到早期拓跋史,政治史的方法显得尤其必要。如果从传统的民族学的角度去研究,除非有更多的考古发现,否则已经没有多少可以利用的资料了,而一旦从政治史的角度切入,就会发现还有不少值得我们分析的素材。正是借助于政治史,作者才描绘出了一个早期拓跋族的隐约身影。由此,拓跋早期的历史不再只是一种部落→国家的理论概念的演进,而是变得具体了、生动了、活泼了。 
研究政治史,不只田余庆先生一人。但他的政治史研究却别具一格,颇有值得论说之处。我们知道,研究政治史,既可以依据政治学的某种理论框架展开,也可以不要这些框架。在我看来,田余庆先生属于后者。我们看作者在本书前言中的一段话:“五胡十六国这一破坏性特别突出的时代得以结束,归根结柢是五胡日趋融合,其主要部分终于陆续积淀在农业地区而被汉族文明逐渐同化之故,这可说是今天史界共识。但是,在这漫长过程行将结束而又尚未结束的时候,为什么是拓跋部而不是别的部族担当了促死催生的任务呢?”(1-2页)我们再看作者在《东晋门阀政治》中就“王与马共天下”说的一段话:“为什么江左会出现这种政治局面呢?总的说来,偏安江左是八王之乱和永嘉之乱的产物,而江左政权依赖于士族,则是门阀制度发展的结果。士族高门与晋元帝‘共天下’,归根到底可以从这里得到解释。但是这还不能说明为什么是琅邪王氏而不是别的高门士族与晋元帝‘共天下’的问题。”(3页)这两段话充分反映了他对历史的认识。这个认识简单地说就是:当时的事情必有当时的原因。由此,他自然不会满足于理论框架给出的解释,也不会满足于一般性的说明,而是一定要找出一个具体的历史原因。受这种认识的引导,他在本书中又有如下的一段话:“我不排除道武帝曾在某个时候发布过离散部落号令的可能,也不排除某些具有定居条件的部落俯首接受号令的可能,但不认为所谓离散部落主要就是如此而无其他更直接、更急迫的原因和具体的过程。”(62页)把问题具体化的思路会很自然地诱导出新的疑问:道武帝究竟是在什么时间?在什么地点?离散了哪些部落?道武帝母后究竟又是来自于哪些部落?回答了这几个问题,离散部落与子贵母死之间的关系就自然地呈现了出来。在解释历史现象时,研究者很容易急切地求助于“规律”、“趋势”来加以说明,他却反其道而行之,一再向“具体”索要答案。与众不同的思考方法使他更像是一位旷野中的孤独旅行者。在他不断的追问中,泛泛的解释愈来愈显得苍白无力,而我们原本熟悉的问题也终于变得陌生了。 
研究早期拓跋史,面临的最大困难是资料太少。作者虽然竭尽全力钩沉索隐,但很多地方还是不得不以推测来弥补资料的不足。这之中有的推测极有道理,给人以启发,但也有的推测难免令人生疑。 
在《<代歌><代记>与北魏国史》一文中,作者指出《魏书·乐志》中《真人代歌》“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应该就是拓跋史诗。根据有限的记载,作者进而推测,在当时替道武帝整理、辑集代歌者只能是汉族士人邓渊。以后邓渊又奉命修《代记》,《代歌》中的内容应是《代记》的主要资料依据。因此《代歌》、《代记》同源。邓渊之后,又有崔浩修国史。记录了早期拓跋史的《代记》基本包含在了崔浩的国史之中。这些资料以后又成为魏收《魏书·序纪》的蓝本。因此辑集《代歌》、撰成《代记》的邓渊应是《魏书·序纪》的第一作者。由此,作者就勾勒出了《代歌》→《代记》→ 崔浩国史→《魏书·序纪》这样一条史学发展线索。我认为这条线索不仅清晰而且很有道理。其中尤为可贵的是作者意识到《代歌》与《代记》之间可能的联系。《代歌》早已不存,根据有关的只言片语而注意到它的价值,并将其纳入史学史的发展线索中是很不容易的。 
与上述合理的推测相比,接下来的推测就不那么合理了。关于邓渊之死,史书中是有明确记载的。《魏书·邓渊传》载,渊从父弟晖坐和跋案,“太祖疑渊知情,遂赐渊死”。但作者不相信这条材料,反而认定邓渊与以后的崔浩一样,也是死于国史之狱。在毫无材料依据的情况下,作者为什么一定要做出这样的推测呢?我想,这或许是因为作者不自觉中已经被前面自己发现的《代歌》、《代记》的线索束缚住了。我们先来看崔浩国史之狱。崔浩因修史“备而不典”、“暴扬国恶”而遭祸。《通鉴》也说崔浩国史“书魏之先世,事皆详实,……北人无不忿恚。”。由此可知崔浩国史当是记录了一些有悖人伦、有伤风化的早期拓跋故事,因此惹怒了皇帝,引来杀身之祸。但是,崔浩所记拓跋早期历史是从哪里来的呢?根据《代歌》、《代记》线索,这些内容应该都是从邓渊所撰《代记》那里来的。既然如此,既然崔浩已经死于国史之狱,那么更早的邓渊能不死于国史之狱吗?看来,为了符合这个逻辑,作者只能让邓渊死于国史之狱了。 
更为值得商讨的问题还不是邓渊之死,而是关于离散部落的史料依据。根据作者的统计,贺兰部被离散的经过是这样的: 
第一次:据《资治通鉴》记载,北魏登国三年(388年)三月,“燕赵王麟击许谦,破之,谦奔西燕。遂废代郡,悉徙其民于龙城。”作者指出:“显然,慕容麟尽徙代郡民于龙城,当包括三十年前的前燕时期由贺赖头率领居于代郡平舒城的数万贺兰部民在内。”(67页) 
第二次:登国五年,道武帝与慕容麟合击贺兰、高车诸部于意幸山。稍后,铁弗刘卫辰又袭贺兰,贺兰部请降于拓跋,“遂徙讷部落及诸弟处之东界。”(70页) 
第三次:登国六年,贺讷兄弟内讧,后燕“兰汗破贺染干于牛都”,慕容麟“破贺讷于赤城,禽之,降其部落数万。燕主垂命麟归讷部落,徙染干于中山。”(70页) 
第四次:作者在叙述皇始三年贺讷之弟贺卢逃奔南燕后说:“至此,道武帝舅贺讷、贺染干、贺卢三人,只剩下贺讷一人,据《贺讷传》,此时贺讷已无所统领,而且后嗣无闻。道武舅氏中还有一个贺讷的从父兄贺悦,待道武‘诚至’有加,得到道武善遇。贺讷、贺悦的部民,自然也被强制离散,分土定居了。这是第四次离散贺兰部落,也就是现知的最后一次。”(70-71页) 
以上离散贺兰部事例中,第一次、第三次都是被慕容部离散的,真正被拓跋部离散的只有第二次、第四次。我们再看独孤部被离散的情况。 
第一次:《资治通鉴》登国二年记“燕王(慕容)垂立刘显弟可泥(亢泥)为乌桓王,以抚其众,徙八千余落于中山”。作者指出:“刘显八千余落徙中山,这是独孤部的主要部分第一次被强徙,是孤独部落离散之始。”(80页) 
第二次:刘亢泥降于慕容氏,《太祖纪》皇始元年(396年)六月“遣将军王建等三军讨(慕容)宝广宁太守刘亢泥,斩之。徙亢泥部落于平城。”作者指出:“这是《魏书》所见独孤部民第二次被强制迁徙。”(83页) 
独孤部被离散两次,一次是慕容氏所为,一次是拓跋氏所为,这与贺兰部被离散的情况类似。作者在59页曾分析说:“部落离散,就其实质说来,本来是部落发育的自然过程,它之所以在道武帝时比较集中地出现,却也是由于道武帝创建帝业的特别需要。这可以解释为什么离散部落只留下这几家外戚部落的个案,而大量的对道武帝帝业无害的部落却得以保存下来。”显然,作者十分关注、十分强调的是道武帝拓跋珪离散贺兰、独孤部落,而不是别人的离散行动。但是,根据他提供的事实,不论是对贺兰部还是对独孤部,离散部落的发动者都是不仅有拓跋氏,而且也有慕容氏。两家各占一半。既然如此,恐怕就不能把离散部落很特殊地仅仅看成是道武帝为打击外戚部落,“创建帝业的特别需要了”。应该说,作者也意识到了慕容氏在离散过程中所起的作用,所以在35页又补充说:“看来,贺兰部破败主要是拓跋部借慕容部之力,得利的是拓跋部。”这个补充其实没有太大用处。这里所谓“借慕容部之力”一说,给人的感觉似乎慕容氏只是前台的表演者,而拓跋氏才是幕后操纵者。如果真是这样,那么上述由慕容部发动的离散事例就不构成对本书观点的反证了,但遗憾的是,实际上并没有这样的材料可以证明。所谓 “得利的是拓跋部”云云,其实只是一种客观效果而已,并不能因此把慕容氏离散贺兰、独孤部归结为拓跋氏操纵的、有预谋的行动。 
这里还涉及到一个概念问题。究竟什么是离散部落?按书中多数场合的表述,所谓“离散部落”就是指强制迁徙部落。但十六国时期某个部族强制迁徙另一个部族从甲地到乙地是常有的事情。如果仅在此意义上来理解离散问题,那道武帝离散部落还有什么特殊意义好说呢?作者似乎也认识到这个问题需要解释,所以在 75页又说:“强徙部落自十六国以来就是常有的事,包含离散部落,但并非都离散。道武帝在完成帝业的过程中,从总体上意识到离散部落的深层意义,理解其必要性和可能性,因而采取更主动更连续更强烈的措施,不只是迁徙部落,而且还要离散部落。这是他与十六国君主的不同之处。”按这个表述,似乎强制迁徙部落又不等同于离散部落了。 
按我的理解,强制迁徙部落不等于离散部落。前引《官氏志》说:“登国初,太祖散诸部落,始同为编民。”《贺讷传》说:“其后离散诸部,分土定居,不听迁徙,其君长大人皆同编户。”按离散的结果既然是“同为编民”、“君长大人皆同编户”,因此所谓“离散”应该是指打破部落内部旧有社会等级结构而言的,唐长孺先生也是这样理解离散部落的,他说“部落的解散使贵族、人民都成为单独的编户。”(唐长孺:《拓跋国家的建立及其封建化》,载《魏晋南北朝史论丛》205页。)而所谓强制迁徙部落,即只是把某部落从甲地强制迁徙到乙地是不可能起到这种作用的。按作者上面的表述,似乎道武帝不只是迁徙部落,而且还离散了部落,但根据前面提到的有关贺兰、独孤部的史料,我们见到的还只是迁徙而不是离散。总之,如果我的理解不错,如果强制迁徙部落真的不等于道武帝登国年间的离散部落,那么本书所有有关于此的讨论就值得重新考虑了。 
写到这里,我不想再就作者的种种可疑推测说更多的话了,因为作者本人早就认识到了这个问题。他在前言中说:“我衰年涉入拓跋史题,颇感力不从心、步履维艰,更感到资料不足,结论难下。”他还说:“基于以上认识,我把本书所见主要作为窥探拓跋史的一种思路,而不一定是作为确切结论,奉献给读者,希望起到促进思考、共同探求的作用,以期尽可能把古史的这一模糊区域一点一点加以辨识。”凭借着几十年的研究经验,田先生当然知道要尽量避免过多推测,本书诸多推测实再是出于无奈,正所谓巧妇难为无米炊。史料的极度缺乏制约着每一个研究者。他已经竭尽全力了,尽管有些推测还需要再斟酌,但他毕竟已经给我们描述出了一个以前未曾见过的、精细的历史过程。这是我们要十分感谢他的。 
《汉书》卷六二《司马迁传》载,西汉刘向、扬雄“皆称迁有良史之材,服其善序事理,辨而不华,质而不俚,其文直,其事核,不虚美,不隐恶,故谓之实录。”本传又载司马迁语:“所以隐忍苟活,函粪土之中而不辞者,恨私心有所不尽,鄙没世而文采不表于后也。”“实录”之说、“文采”之说,正反映了史学的两个特点,一方面,史学是求真的学问,另一方面,史学也是展现史家思想、才华与魅力的手段。换言之,史学不仅是科学的,而且也是艺术的。从求真的角度看,我对《拓跋史探》多有疑惑;从展现史家个人才华与魅力的角度看,我又认为这是一部成功的著作。这种矛盾的态度或许就说明了这样一个浅显的道理:真与美有的时候并不能完全统一。 
(载《读书》2004年第6期,题目被编辑改为《在题无剩义之处追索》)
学术批评网(www.acriticism.com)转发 2005年11月20日

"他钵可汗의 불교 도입에 대해서"는 唐代九姓胡与突厥文化(蔡鸿生 中华书局 p147)에 나오는 글에 의문이 들어서 작성한 글이다. 木杆可汗의 동생인 他钵可汗(572-581)은 불교를 도입했다. 하지만 1기 투르크제국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인 다른 칸은 없었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은 어째서 불교를 받아들였을까?


우선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전파는 두가지의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민간에 먼저 유포가 되고, 그 세력이 일정정도 이상이 되었을 때 압력을 받은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수용하는 경우이다. 기독교의 로마에서의 발전양상이 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현실적 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종교가 지도자의 비호아래서 점차 민간에 유행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백제에서의 불교유입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의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판단해야될까? 他钵可汗이후에 해당 종교가 민간에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他钵可汗사후 불교는 순식간에 사멸한 것은 他钵可汗 개인적으로 해당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석해야될 것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은 왜 불교를 수용했을까? 蔡鸿生은 이에 대해서 부국강병을 원했던 他钵可汗와 불교를 받아들이므로서 突厥가 약화되기를 원했던 北齐왕의 현실적인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북제와의 생각은 현실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그가 투르크에 전달한 열반경(涅磐经)의 내용을 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의 입장이다.

지도자는 바보가 아니다. 단지 불교를 받아들이면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믿는건 어떤 현실적인 근거도 없다. 분명히 일정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래동안 투르크 세계의 주류 종교인 샤마니즘도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떄문이다.


혹시 他钵可汗은 투르크의 전통종교인 샤마니즘의 사제집단과의 일정한 충돌을 하였고, 불교를 이용하여 이러한 사제집단과의 알력싸움을 할 생각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알력싸움에서 패하게 되고(9년의 짦은 통치), 그의 뒤를 잇는 沙钵略可汗은 오히려 "从天生"이라는 샤머니즘적인 가치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 아닐까?




추가적인 사료 조사가 필요한 점

1) 他钵可汗의 사망이유

2) 他钵可汗과 샤만집단간의 충돌에 대한 증명사료

3) 他钵可汗 계승에 대한 문제가 없었나?





<중국기본고적고 中国基本古籍库>는 북경대학교를 중심으로 전국의 각 대학교들이 참가해서 만들어낸 중국 중점 전자출판 사업중에 하나입니다. 선진시대부터 중화민국시대까지 (기원전 11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의 역대 서적 1만여종, 총합 16만여권을 전산화시켰습니다. 사실상 현재 나온 모든 고적의 전문과 1~2개의 영인을 제공합니다. 총 합쳐서 17억이 넘는 자이고, 판본이 1만2천여개, 영인이 1천여만항목에 이르며, 용량만 320G에 달합니다. 이 분량은 <사고전서 四库全书>의 3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입니다. 다양한 검색으로 편안하고 쉽게 원하는 항목을 찾을 수 있습니다.

 

image 기존의 사고전서와 또다른 점은 한국어를 지원하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에서 한국어 지원이라고 해도 메뉴 몇개 한국어로 만든것 뿐이지만,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그냥 중국어판으로 설치했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은 안해봤습니다.) 앞으로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서양권에 판매할 목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사실 중국학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필수라고 해도 될 프로그램입니다.

 

개인적으로 사용해본 느낌은 기존의 사고전서 프로그램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프로그램에서 데이타량만 늘린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팍팍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래 사고전서 프로그램이 잘 만들어졌기에 불만은 없습니다.

 

물론 문제점이 있습니다. 실제 사고전사든 전자 사고전서든 오탈자의 천국이라는 명성을 휘날렸다싶이, 이런 방대한 분량은 아무리 감수를 하여도 분명히 수 많은 오탈자가 존재합니다. 정확한 학술논문에서는 무조건 제대로 된 원문을 찾아보아야합니다. (이거 귀찮다고 안했다가  딱 걸려서 죽어라 욕먹은 어떤 사람도 있습니다.-_) 하지만 너무나 방대한 중국 고적들에서 원하는 항목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현재 북경대 내부에서는 접속이 되며, 몇몇 wn대학교에서도 서비스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절대 결코 접속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조만간 불법 해적판이 생겨날듯 합니다. 하지만 320기가라는 놀라운 용량이 해적판을 막는 가장 큰 변수가 될듯 합니다. 왠만한 하드디스크로는 설치도 못하겠군요. DVD로 설치하다가는 어느 세월에나 설치가 될런지....

 

개인적으로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현대 한국어의 번역 버젼을 제공하는 것도 좋지만, 아직도 전자화되지 못한 수많은 한국의 고적들도 위와 같이 일단 데이타화하고 천천히 번역작업을 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이미 수 많은 고적을 체계적으로 정리는 해놓았지만 데이타 작업 소식이 안 들리는 일본. 일단 밀어붙여서 오탈자가 많지만 데이타화해버린 중국. 그리고 천천히 데이타화하고 있지만 진척이 느린 한국. 하지만 일본처럼 기존의 고적들도 제대로 발굴이 안되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데이타화하랴 고적 발굴하랴 많이 힘드실듯 합니다.

아래글을 심심풀이로 씹으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점점 취미가 이상해져가는 것은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졸저 『신시본토기』의 378쪽 원문에서 인용.
(원문)
桓公問管子曰, 吾聞海玉幣七莢
可得以問乎, 管子對曰 陰山之유혼一莢也
燕之紫山白金一莢也, 發朝鮮之文皮一莢也

(풀이)
환공(桓公)이 관자(管子)에게 물었다. "나는 천하에 일곱 군데의 보물이 있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보물을 어디서 구할수 있겠습니까? 그 위치를 자세히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관자가 대답하기를, "첫번째 보물의 위치는 월색(月色)의 보물이 있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이요 두번째는 은이 나는 자산산맥입니다. 그리고 발조선에서는 반점(斑點)이 있는 모피를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이 세번째 보물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항 외에도 같은 책 속의 경중갑(輕重甲)이라는 항목을 통해서 조선과의 거리가 8천리라느니 조선의 문피를 교역하는 일에 말을 잘 듣지 않으니 많은 돈으로 잘 대접하면 표범가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문에서 보다시피 호피(虎皮)라는 단어는 찾을 수가 없는데도 호랑이 가죽이란 해설이 등장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말로 호(虎)를 범이라고 하고 표(豹)를 표범이라고 하며 바다에 사는 해표(海豹)를 물범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원문에서 볼 수가 있는 "문피(文皮)"라는 단어의 뜻은 무늬있는 가죽을 통틀어서 한 말이므로 확실히 구분이 되지 않지만 경중갑에는 "豹之皮容金而金也"라는 말이 등장하므로 문피는 표범가죽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豹는 海豹, 즉 물범을 가르키는 말이라는 것이 정답이었다. 호랑이 가죽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선 가죽과 털옷이라면 추운 지방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을 위시한 만주대륙을 연상하게 되고 따라서 고구려의 수렵도를 상상하게 되면 물범 생각은 아예 달아나고 만다.
그러나 호피를 주요한 수출품으로 다룰만큼 많은 양이 생산되는 것은 아니고 더욱이 호랑이를 산신으로 모시는 풍속이 있어 두려워하며 당시의 사냥술로는 포획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물범이라는 짐승이 우리 조상들의 귀중한 옷감이 되고 또 수출품으로서 외화를 흭득하는 효자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뒷날 발해국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품목 중에는 약간의 호피도 있었다는 것을 참고할 수도 있다.
본래 이 물범이라는 짐승은 북위 42도 이상의 추운 지방인 추코트해나 베링해협에서나 볼 수 있는데 북위 38도 근방인 발해연안에 둥지를 마련하고 서식하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였다고 한다. 같은 물범 중에도 이곳 발해연안 묘도군도에서 서식하는 종류는 얼룩무늬 물범으로써 베링해의 물범과는 차원이 다르다. 큰놈은 크기가 1.3m 정도이며 몸무게는 160kg으로써 근래에는 백령도 근해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대략 3,000마리 정도가 묘도군도를 중심으로 서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물범 이야기만 가지고도 고조선은 발해해협의 묘도군도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이다. 물범이라는 짐승이 평양이나 갈석산 근처에서는 살 수 없지 않은가? 물범의 활동한계는 요동만에서 백령도까지라고 KBS는 밝힌 바 있다.

출처 : 누르시면 날라갑니다~



토론 준비 때문에 글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문장이다. 얼핏 들어보면 말이 되는듯 하지만 솔직히 원문부터 엉터리로 해석한 부분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문에 유혼은 礝碈이며 옥과 비슷한 류의 보석이다. 월색의 보물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건지 모르겠다. 본인이 미숙한 탓인지 출처를 모르겠다. 그외의 해석도....왠 산맥이 튀어나오는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반쯤 기분풀이로 하는것이니 패스--


일단 표豹를 물범으로 해석한것.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실제로 표범이 당시 아시아에 특히 동북지방에 많이 생존했었다는 것은 사료에서도 증명되는 것이다. 표가 호랑이 가죽이 아니라 표범 가죽일 가능성은 배제한 점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물범의 가죽보다는 표범의 가죽이 반점이 있는 가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다표범도 가죽에 줄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반점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또한 열심히 발해만에서만 나는 물범으로 고증을 했지만, 가장 간단하게 명대에 쓰여진 <朝鲜国治>을 보면 "鴨綠江爲大產, 金銀銅鐵水晶鹽細苧布細花布龍文簾席白硾紙狼尾筆紫花硯果下馬長尾雞貂豽海豹皮八稍魚昆布秔黍麻榛松人參茯苓薏苡,其餘不能殫載云." (표점 무시. 알아서 찍으시길--) 물범가죽을 이씨조선의 특산으로 소개해놓고 있다. 고대 전국시대야 정확하게 고증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이씨조선시대에는 분명히 한국의 영역이 발해만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물범가죽이 특산품이 될 수 있을까? 분명히 한반도 내, 당시 이씨조선왕조 범위안에서 물범이 잡혔다는 말이 된다.


이로서 위의 주장은 대충 깨진듯 하다.

아....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이런 쓸데 없는 글이나 적고 있으니...후..이제 즐거운?! 자치통감의 세계로 출발-_-! 이제 슬슬 前秦전진의 천하통일이구나! 전진! 전진하라!!! (...차라리 한국에서 이주일에 한단락 나가고 싶어.ㅠㅠ 무서븐 중국애들 속도로 읽어내려가야되다니.....가능할리가 없잖아!!! )

北京大学历史学系2008年硕士生拟录取名单公示

一、内地考生(共计19人)

丁 浩、邓 阳、刘玉群、刘乳滨、刘崇锤、何存金、余奕珠、张 寒、张曜光、李华程、罗 志、郑启芬、胡 宁、栗河冰、袁 鹏、高俊杰、韩 飞、韩 澍、韩基奭

二、推免生(共计21人,其中含学工选留1人,不占招生计划):

于  娜、丹筱彤、王  月、王  倩、王梦婕、冯  佳、冯立冰、吕  超、张心远、张宁芳、张成晗、李坤睿、李怡文、李梦岚、杜  乐、陈  捷、陈冠华、陈博翼、胡  珂、胡晓丽、聂溦萌

三、留学生(2 人)

马  硕、王  林


北京大学历史学系

    2008年4月9日


없다. 없다. 없다. 유학생은 2명인데, 이름으로 보아서는 화교이거나 서양애들이다.

최소한 한국 사람의 이름은 아니다. 없다. 없다. 없다.

(2차 시험에서 떨어지신 한국분이라고 추측되는 한 분. 애도를 표한다. 후....)


기대했었다. 본인보다 나이 어린 후배 한명 안 들어오나 말이다. 사실 현재 본과에 다니는 한녀석이 들어왔어야 되었는데, 나보다 훨씬 더 역사 공부에 어울리는 녀석인데 말이다. 결국 본과 출신의 석사인생 2명의 모습을 보고 살포시 포기해주시더라. 좋은 모습 보여주러 그리 노력했는데 말이다. 큭....

내년을 기대해 보리라. 한 녀석 있다. 그나마 살아있을 한명의 생존자가...

그녀석 이름에는 아예 석사의 석자도 있다!! 자!! 와라!! "원래 석사여!"


왜 굳이 한국인이냐고? 외국에 있으면서 중국애들하고 안 노냐고? ...지도교수님이 소수정예(본인 빼고) 주의라서 현재 박사생 2명에 석사생 1명(이게 본인)만 있다. 맨날 3명이서 노는데도 지쳤다. 좀 데리고 놀?! 후배가 있어야되는데 말이다. 새로 들어오는 후배 없다. 아...새로 한명이 들어오긴 한다. 본과에서 박사로 점프해서 말이다. 후....


없다. 없다. 없다. 그래서...

외롭다....이것이 소위 인문학의 위기인가? (........)




자기 얼굴에 침 뱉기 : 올해 전공과목 시험이 생겼더라.작년에는 연구생 시험 개혁한다고 딸랑 면접만 보았는데 말이다. 으음...지금까지 시험운이라고는 개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시험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역사가 나를 부른다라는 폼나는 말도 있겠지만...안 불렀으면 좋았을걸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새벽이다. 자치통감. 사마광님아~ 조금 짦게 쓰지 그러셨어요? ㅠㅠ


김용덕 : 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서울대학교 동양사 교수, 하버드대학교 석박사, 일본근현대사 전공.

 

김용덕 교수님은 한국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몇가지 역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분명히 존재했던 조선조의 사대주의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울대 교수가 북경대에서 강의를 한다는 특수상황을 감안하면 이해는 할 수 있다.

그가 보는 현재 한국의 4대 문제는 한중, 한일, 그리고 남북한 관계가 있다. 더욱이 중일간의 역사적 문제를 중간에서 어떻게 처리하는냐도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기에 말할 수밖에 없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기준으로 상대방의 국가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인의 역사적 사실은 매우 좁은 범위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타자가 되어서 바라보아야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과 임오군란을 예로 들어서 한국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역사관의 정립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소중화의식은 민족의 독립성을 나타내주기도 하지만 기본은 사대주의가 아니던가? 흐음...

 

전근대에서는 동북아의 기본적인 가치가 유교(성리학)였지만, 근대부터는 서양의 가치가 중심적인 기준이 된다.

 

교수님은 한국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관점을 사람들이 잘 알것이라는 이유로 건너 뛰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강의의 가장 핵심이 되어야될 부분을 건너뛰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람의 입장에서 듣는 한국의 중국과 한국에 대한 관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

교수님은 조공책봉제(朝贡册封体制)을 현재 미국과 다른 나라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비슷하다.

 

 

그렇다면 교수님의 현재 역사전쟁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1)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

본인의 생각으로 이론적으로, 이상적으로는 무조건 맞는 소리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교수님도 분명히 알지 않은가? 그래서 본인이 고대사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동북공정과 같은 몇가지 문제는 있지만 사실상 모든 문제가 정치와 연결되는 근대사보다는 상황이 좋다고 할 수 있다.

 

2) 서로의 "역사주권"을 존중하여야 한다.

마치 영토와 같이 역사도 그 나라 범위안에서 보호되어야된다는 소리인데, 솔직히 이상하다. 그렇다면 국제적인 학술교류는 왜 하며, 국제적인 주류 역사해석은 어떻게 해야되는것인가? 무엇보다 이것 역시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는 현실의 한 모습에 불과하지 않은가?

 

** 열린 민족주의 开放的民族主义(Internationalized Nationalism)

재미있는 개념이다.

 

3) 동아시아 공동체

교수님는 중국의 파워가 홀로 너무 강하여서 이런 공동체의 실현이 매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실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군사력으로보아도 일본은 중국에 그리 떨어지지 않으며, 그 중간에서 한국이 충분한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수님은 공동체의 실현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매우 모호한 개념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싸가지 없게 말하면, 이런 내용은 나도 예전부터 주구장창 이야기해놓았던 이유다. 구체적인 방법이 정말 없는 것일까...?)

 

동아시아안의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공통의 가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가치(East Asian Value)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로 만들면, 이런 가치는 소프트파워(Soft Power)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는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기보다는 세계를 평화적으로 모두 함께 발전하는 길을 열어야 될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이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간의 문화를 존중한다면 자동적으로 해소될 것이다라니...;;

 

 

** 유럽공동체가 생겨난 이유는 그동안 죽어라 서로 전쟁을 해서 이제 합치자는 분위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아시아 공동체가 생겨날려면 동아시아도 죽어라 전쟁해야 된다!!! 당연히 교수님도 농담으로 한말이다.

 

 

문답 :

역사 주권이라는 개념은 미국의 학술상에서는 기본적인 주권중에서는 하나로 포함된다. 전통적인 주권에서는 국토, 국민, 지배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 역사라는 것은 빠져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일제시대와 같이 전통적인 주권을 모두 상실한 가운데, 역사주권만은 남아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Q :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뒤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해서 역사를 이용해야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모순 아닌가요?

그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공동체를 위해서 먼저 역사전쟁을 해결해야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동북아시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동북아시아 역사연구센터를 만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영향력을 보면 한국은 영향을 행사하기보다는 받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너무 치열한 역사 전쟁상태를 생각하면 한국이 그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없을까?

 

 

그 외 잡상 :

한국과 일본의 지배자는 같은 민족에서 나온 사람들이지만, 중국의 지배자는 다른 민족에서도 나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물론 이런 다른 민족지배자들도 중화사상에 빠져들지만 말이다. ---> 일단 한국과 일본은 단일민족도 아니고 한나라나 몽고와 같은 외부세력도 많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예전의 민족관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 사람 모두가 남북한의 통일을 바라고 있다.  --> ....솔직히 반대파가 예전에 비해서 많이지지 않았나?

 

 

통역자에 대해서 :

북경대학교 한국어과 연구생이라고 한다. 중국인이다. 이번에 역사과 박사시험을 보고 면접만 남았다고 한다. 그럼 머...들어오겠지. 현재까지는 한->중 번역만 하고 있음으로 정확한 실력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원래 말에서 어려운 말들을 조금씩 빼놓고 있다. (예를 들어서 역사적 구체적인 사실이나 속담같은 말은 번역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빨간옷을 입은 한국분. 박사생으로 알고 있는데, 죄송하지만 중국어 실력이 부족한듯 하다. 더 열심히 하셔야 될듯...

 

 

牛大勇

동북아시아의 통합

 

1) 강력한 초거대국가

내부 집단들이 공통적으로 합쳐야겠다는 인식 -- 적대할 국가

 

2) 현재 복작한 정치외교 상황 - 분리주의문제

조선, 한국, 타이완, 중국, 일본이 서로 너무 얽혀 있다. 일단 조선과 한국 그리고 중국과 타이완간의 문제가 해결되야지 동북아의 통합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3) 전쟁책임과 역사책임

일본과 반일본간의 일제시대의 전쟁 책임과 역사책임을 포함한 문제. 다시 말해서 일본을 믿을 수 있으냐는 점.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과 서술에서 반박할 것이 몇개 있었음.

Pre-modern Polyethnicity and Ethnic Homogeneity - William H. Mcneill

저자는 The Rise of the West: A History of the Human Community 을 쓴 서양에서도 보기 드문 포괄적인 역사연구가이다. 해당 논문도 역시 서양과 동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역사체를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저자는 특별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글의 전반적으로 서술한 이야기에서 다양한 생각들을 읽어내릴 수 있다. 주의해야될 점은 저자는 특정 역사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연구된 내용을 이용하여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본인이 눈여겨서 본 부분은 중국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중국은 1000년(송대)전까지는 비교적 개방적인 사회였고 그래서 송대에 눈부신 발전을 이우러냈지만 그 뒤로 점차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반대로 고대에는 개방적이었던 일본은 점차 폐쇄적으로 되어가지만 나중에 서양의 압박으로 개방을 하고 발전을 이룩해 낸 부분이다.


해당 사항을 정리해보면, 개방을 하면 발전을 하게 되고, 그 발전의 정도가 일정 이상이 되면(아마 주변국에 비해서 높은 발전 정도), 반대로 점차 폐쇄적이 되어가고 발전의 속도도 줄어들어서 상대적으로 쇄락해간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폐쇄적으로 되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당 집단 내부의 기준으로 발전의 정도를 인식했을 때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2차세계대전 전까지, 아니 버블경제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외국인에게 개방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은 누구보다 갇혀 살고, 이기적으로 자신들만 챙긴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물론 쇄락이 먼저인가 폐쇄적이 되는 것이 먼저인가라는 닭과 달걀의 문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위의 말을 바꾸어 보면 아직 개방적일 때에는 아직 일정 수준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폐쇄적인 한국은 이미 일정 수준이상 발전한 것인가? 그렇다. 한국인의 대다수가 현재의 발전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직 한국의 발전에 불만인 자들이여. 세계화를 외쳐라. 하지만 더욱 중요한건 다른 한국 사람들을 욕구불만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직 욕구불만이 부족하니 외국인을 외계인처럼 보는 한국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욕구불만인 본인부터 이야기 하겠다.

한국 발전하기는 개뿔!
제발 소원이다 욕심을 좀 가지자!
더 발전해야될거 아니냔 말이다!


《生成哲学》原名叫《事物生成共源根》(Ghob dongb soudjanx jidjios oddel jiongx)。全篇共三章四十九句。第一章一十九句,论述事物生成的源根和人类进化的历程;第二章十六句,论述事物生成基本要素,关系和结果;第三章一十四句,论述“生”和“成”的辩证关系。

是湖南花垣县猫儿乡苗学大师龙玉六先生口授,源自《古老话-后换篇》中的一章,相传出自苗族先民哲人与部落领袖阿濮补僮。这篇文献共339字,以朴素的唯物主义历史观讲述了万物生成的根源和人类进化的历程:

“先出现天,后出现地。从那时起,盘古就分开了天和地。先安好日月,后装齐星斗,山水风雨都齐备。天气罩着地,地气映着天,天气化成了搜媚若,地气化成各薄港搜。从那时起,什么东西都具备生成条件,仡索才来造生命,陆地水域有生物存,先起苔藓生鱼虾,后有蛆虫蛇蟒鸟雀虎狼牛马;接着才有猿猴类人猿,最后才育原始人。人用脑想用手做,从古代直到如今,归他来掌管乾坤。干万事物同一理,事物生成共源根。”

出自于:东人达《试论中国少数民族史学》史学理论研究 2008年第1期。

어떤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부르는가? 어떤 사람을 중국인이라고 부르는가? 일본인이라고 부르는가?  현재 한국, 중국, 일본의 국가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라고 한다.

-- "The Peoples of Asia" - Science and Politics in the Classification of Ethnic Groups in Thailand, China, and Vietnam By CHARLES KEYES 중의 문장을 살짝 패러디한 것.


어마어마하게 단순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곰곰히 씹어보면 너무나 씁쓸한 문장.


 CHARLES KEYES는 민족이란 허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민족의 개념과 범위는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서 너무 쉽게도 변한다. 그리고 이렇게 변한다는 것 자체가 영원한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이 한민족이라고 하는 공동체의 틀은 과거 정신문화연구원이 피나게 만들어낸 역사관의 결정체일 뿐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이 누군가에 의해서 세뇌된 하나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곰곰하게 되돌아보자. 그리고 "한민족 짱!" "한민족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짱깨는 드러워"나 "쪽발이는 키작은 병신"과 같은 이야기를 하지 말고, 민족이나 국가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단지" 인간으로서 세계를 바라보았으면 한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은 없다.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五胡和六夷的出现 :

오호는 북방민족 스스로가 만들어낸 분류방법이고, 육이는 중원에서 만든 방법?

--》 就是自称和他称的问题

혹은 오호는 이족이 만들어낸 호족에 대한 분류이고, 육이는 호족이 만들어낸 이족에 대한 분류?

--》


1357 --> 夷所使用的或者所喜爱的数字

2468 --> 胡所使用的或者所喜爱的数字



오호와 육이의 원류에 대한 연구야 이미 많다. 하지만 그것을 숫자를 대입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해당 내용은 논문으로 쓰기에는 힘들것 같다. 논문보다는 간단한 잡상으로 정리해서 나중에 블로그에 다시 올리는것이 좋을듯. 이런 건 논문으로서의 가치가 없으니..;;

계주의 최초 기록은 유교의 기록이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예를 강조한다. 혹자는 해당 일을 지하학당으로 연관시키기도 하지만, 본인은 丁强의 생각처럼 보편적인 민속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계주는 한대에 관직에서 기본적으로 스승이라는 의미의 유교식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오도미교의 계주는 종교와 통치가 합쳐진 방식이었다. 그리고 조조정권은 어느 정도의 비유교적 정권이었으며그래서 많은 비유교적 요소를 받아들인다. 그 중에서 조조가 새로 만든 군계주의 경우 그 성격이 지방통치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다. 이는 과거의 유교적인 계주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고로 본인은 해당 군계주가 도교 혹은 도가의 영향을 받은 관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특히 동진시대와 같이 오도미교(천사교)가 정권을 잡는 와중에는 이러한 군계주의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군계주의 출현빈도와 성격으로 해당 시기의 도교의 영향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이상야시꾸리한 불법 종교가 사실은 정부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있고, 사실상 뒤쪽에서 국가를 움직였다는 지금의 프리메이슨 음모론이 역사 시대에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생각해보라. 바로영광교가 지금 현재 한국의 정치 경제계의 인물들을 다 잡고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후후후....


北朝祭酒比南朝的祭酒更多,更强大。我怀疑,这是否祭酒和北方民俗传统的结合而出现?

。。。。먼저 사상을 바꾸고 나중에 습속이 변했다고 나온다. 그처럼 습속은 사상과는 다르게 매우 바꾸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습속 혹은 제도가 변했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해당 사상이 사상계에서 일정이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본인 역사를 공부한다. 그리고 저 지도를 보는 순간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학문적인 가치는 0%에 가까운 쓰레기이다. 물론 한가지의 가설로서 존중 받을 수 있지만, 해당 가설의 증거가 너무나 부족하다.

 

고구려의 영토 표시가 지 마음대로다. 해당 영토 표기는 태왕사신기에서 봤던 그 영토 표기였다. 그것을 보면서도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판타지" 드라마라는 생각에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이건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올려서 많은 외국사람들이 보는 지도인데 여기에다가 이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대충의 문제만 말해도...

 

1) 백제의 산동반도설 통치설은 한마디로 증거자료가 너무나 부족하다. 한마디로 학문적으로 인정 못 받는다.

2) 거란의 위치도 훨신 아래쪽이어야 한다. 아니 고구려의 위대함?!을 말하려면 차라리 거란이 고구려에 통합되어있어야 정상이다. 실제로 중국대륙의 왕조들과 고구려의 사이에서 방랑을 하며, 한때는 고구려에 통치를 받았고, 다른 때에는 중국대륙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해당 위치도 요서쯤에 배치하는게 합리적이다. 물론 시대마다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3) 후연은 아무리 약해졌어도 최소한 요서정도까지는 지배했었다. 그런데 해당 지도에는 베이징(북경)도 점령 못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렇게 홍보를 하면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증거를 갖추어야 되는데, 이것은 너무나 허무맹랑하다. 당장 위대한 고구려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중일을 제외하고는 고구려는 단지 타국의 역사일뿐이다. 우리가 로마의 문화가 유렵의 여러 국가에 내려온다고 간략하게 말하는 것처럼, 타국의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명망한 뒤 현재 한중일 모두에게 일정정도의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서 이게 누구 역사란 말이 왜 나오는 것인가?

헛소리다. 민족주의에 사로 잡힌 오만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의 역사일 뿐이다.

 

 

더 황당한 건 독도다. 대체 저 시기에 "독도"라는 지명이 어디있었냐?

기본적인 역사 지도의 역할도 못하는 쓰.레.기. 일 뿐이다.

278 279禁娶樂人

딴따라와 결혼할 수 없다. 만약 한다면 곤장을 내리리라!

n 元典章 戶部四 (禁取樂人為妻)(通制條格校注 63)

n 元典章 戶部四 (樂人嫁女體例)(通制條格校注 62)

教坊司來管理樂人?

n 明 :娶樂人為妻妾

(唐明律合編 引 集解)(大清律輯注)(唐明律合編)

 

280 281 職官娶倡

관원은 창기를 처나 첩으로 모두 데려올 수 없음

n 元史 刑法志

n 元典章 戶部四 (哈迷與張德榮爭房地)

창녀에 대하여서 입는 옷까지 규정될 정도로 확실한 규정이 되어있었다. 사는 집도 동류와 살 수 있었다. 같은 호구이던가 혹은 포주이지 않았을까?

해당 사항을 보면 나중에 명대의 법률에서는 창녀와 딴따라가 거의 같은 수준이지만 원대에는 창녀보다는 딴따라에 대한 대접이 좋았다. 머..그게 그거이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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