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子曰:凡用兵之法,馳車千駟,革車千乘,帶甲十萬,千里饋糧,則內外之費,賓客之用,膠漆之材,車甲之奉,日費千金,然后十萬之師舉矣。

손자 가라사대 :
군대를 운용하게 되면 경전차 1000대와 중전차 1000대 그리고 병사 십만이 필요할뿐더러 그들을 위한 천리길의 먹거리 수송이 필요하다. 이렇게 밖으로 소비되는 돈 이외에도 외교전과 전차와 갑옷의 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하다.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10만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


2. 전차병(사士)와 독립보병(병 徒, 兵)
최초로 출현한 병종은 당연히 보병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보병은 가장 기본적인 병종으로 남아 있다. 손자병법의 보병은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에 관련된 전차병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된 보병인 일반병사였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그리스와 로마의 병사가 바로 독립보병이다. 그들은 갑옷을 입고, 방패를 차고서는 긴 창으로 창날의 벽을 형성하였다. 당시의 농업민족은 선거권이 있는 공민만이 전사가 될 수 있었고, 그들은 모두 보병이었다. 기병은 북방의 게르만족을 고용하여서 유지하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것은 겁쟁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북방유목민족이 남쪽으로 이동을 하면서 철저한 패배를 맛보게 되면서 기병의 중요성을 깨닭게 되지만 보병의 중요성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사와 병은 모두가 보병이다. 그러나 장기에서 사는 왕의 바로 곁에서 왕을 수호하지만, 병은 후퇴를 할 수 없고 특별한 공격력도 없는 허약한 존재인 것처럼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사는 전차병으로서 전차에 올라타서나 전차의 주위에 있던 갑옷을 입은 입은 보병을 의미한다. 그러나 병은 전차와 관련이 없이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보병이며 평시에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다. 병사는 사실 전투를 보조하거나 전투물자를 운반하거나 음식을 만드는 등의 후방지원을 하던 인력이었다. 그러나 춘추시대 후기로 올 수록 병사의 숫자가 증가하였고, 독립적인 부대로 편성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비교적 신분이 낮았던 병사들이 정규병으로 편성되기 시작했고, 그들 역시 갑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사실 현재에는 독립보병라는 말로 동일시 되는생 도徒와 졸卒은 사실 조금 달랐다. 도徒의 기본적인 뜻은 "걷는 사람步行也"이라는 의미이다. 군인은 걷고 또 걷는다. 졸卒는 의衣와 같은 의미로서 보급병이라고도 하고, 하급계층이 입는 옷에서 연유하였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군사학상에서는 도와 졸 모두가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거나 도졸徒卒라고 합쳐서 사용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졸은 단순히 하급병사를 의미할 뿐만이 아니라 군사편재단위를 나타낸다.

고대 군사의 편재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초기의 10인제와 후대의 100인제이다. 10인제는 정확하게 십오什伍제도로서 10명을 십什이며, 5명은 오伍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서주시대부터 춘추시대 초기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후대로 올 수록 병력의 숫자는 증가하였고 십오제도는 군대의 최하급 편성단위가 되었다. 100인제는 졸냥卒兩제도였다. 100명 단위를 졸이라고 말했고, 25명을 냥라고 하였다. 4개의 냥가 모여서 1개의 졸이 되는 것이다.

전차에는 전차에 타는 3명을 합쳐서 전차병은 총 75명이 동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독립보병 72명이 같이 행동하였다. 보급차에는 총 후방요원 25명이 배정되었는데,배식담당10명, 의복담당 5명, 사료담당 5명, 잡일담당 5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약 전투요원만 생각한다면 75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방요원까지 합친다면 정확하게 100인제가 되는 것이다. 100인제는 비교적 새로웠던 제도였다. 이런 100명에게는 한대의 전차가 주어졌는데 병력은 어떻게 배치되었을까? 조조의 신서新書에 따르면 아마도 전차를 중심으로 전후좌우에 배치되었으며 3냥(75인)이 실제로 전투를 담당하였고, 1냥(25인)은 후방에 위치하며 후방임무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조조의 해석은 조금 다르다. 그는 사마법司馬法의 10인제를 근거로 치거(馳車)만을 말이 끄는 전차로 생각하였고 혁거(革車)을 소가 끄는 보급차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차인 혁거에 전투요원 10명, 후방지원 5명이 같이 하였고, 보급차인 혁거에 보급요원 3명이 같이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는 100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어도 인원은 18000명에 불과하며, 10만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송나라의 장예張預는 조조의 해석을 사마법司馬法의 100인제로 재해석하였다. 장예는 치거는 공격전차이고 혁거는 수비전차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공격전차인 치거 3부대가 앞과 좌우에 있고, 후방에 수비전차인 혁거 1부대가 있으며, 각각의 부대는 25명이 배치되어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비교적 합당하나 이미 혁거가 소가 끄는 보급전차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가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아마도 실제로는 경전차인 치거 한 대가 전방에 위치하고, 중전차인 혁거 한 대가 후방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전차에는 좌우에 1냥(25명)씩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보급차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보급차는 군대의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나라의 군사제도는 관중管仲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보통 소융小戎이라고 불렀다. 소융은 전차의 또 다른 이름인데, 한 대의 소융에는 50명이 배당되었다. 이를 생각해 보았을 때 각각의 전차에는 50명씩 배치되어서 총 2대의 전차로 100인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3. 기마병
기마병은 전차보다 후대에 나타났다. 서아시아에서는 야수亚述 궁전 벽화를 놓고 보았을 때 약 기원전 800여년쯤에 처음 기병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조赵나라의 무령왕武灵王이 북방이민족의 옷을 입고 말을 타며 활을 쏘았다胡服骑射라는 말을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전국시기 쯤 기병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혹자는 상나라시대에도 기병이 존재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입증이 되었다고 하기는 매우 힘들다. 다만 흉노匈奴와 동호东胡가 모두 전국 말기에 몽골에서 시작되었으며, 조나라 역시 지금의 베이징 위쪽에 위치했던 국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조나라가 북방민족에게 몸에 딱 붙어서 말을 타기 쉬운 복장과 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기술을 배웠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당시의 기병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병이 결코 아니었다.

흔히 기병이라고 하면 삼국연의의 유비 삼형제와 여포가 말 위에서 싸우는 일기토전을 연상하고는 한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는 물론이고 삼국시대에도 그러한 기병싸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설처럼 삼국시대에 일기토가 벌어졌다면 그들은 모두 말에서 굴러 떨어져서 부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단지 말을 탈 때 발을 디딜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되는 한발 등자만이 존재하였다. 그렇기에 달리는 와중에 서로 칼을 겨누며 격투를 한다는 것은 말에서 떨어지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양발 등자는 사실상 몽골제국 초기에 완성이 된 것이다. 몽골이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바탕에는 단순히 호전적인 성격과 공격적인 전략만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의 도움도 받았던 것이다.

원나라 시기 이전의 기병은 말을 타는 궁수의 개념이었다. 말을 타고 열심히 적에게 접근을 해서 말에서 내리거나 말을 안정적으로 정지를 시킨 이후 화살을 쏘고 적이 접근해오면 열심히 달려서 물러난 다음에 다시 화살을 쏘는 개념이었다. 그러하기에 장기에서도 말은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멱이라고 하여서 일보 전진하는 자리에 장애물이 있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마병이라면 장애물을 뚫고 가야 할 것이지만 당시의 기마병은 궁병이었기에 멱에 걸려버리는 것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리링의 손자병법이란?을 참고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관심으로 번역을 한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전에 해 놓았는데 정신이 없어서 있는지도 몰랐군요. 너무 오래동안 글을 안 올려서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올려봅니다. 퇴고는 당연히 없었으니 알아서 봐주셔요. 저는 계속 졸업논문 작업을 하러 가겠습니다.

오탈자는 악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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